한 철인3종대회에서 우승한 뒤 활짝 웃고 있는 이명숙 씨. 이명숙 씨 제공.
“물이 무서워 대중탕에도 가지 않던 시절이었다. 강원도 홍천 오대산으로 가족 친지들과 놀러 갔는데 누가 장난으로 날 물에 빠뜨렸다. 허우적대다 일어서니 물이 무릎에도 오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바로 돌아와 수영장에 등록했다.”
당시 서울 송파구 일대에는 잠실 롯데월드 수영장 밖에 없었다. 새벽 반에 등록했다. 첫째 딸이 갓 돌이 지났을 때였다. 1년 동안 지각 한번 안하고 나갔다.
2017년 한 철인3종대회에서 우승한 이명숙 씨. 이명숙 씨 제공.
이 씨는 둘째를 낳을 때까지 3년간 단 하루도 수영을 거르지 않았다. 수영 실력으론 맨 꼴찌로 시작했지만 금세 최고가 됐다.
“가장 먼저 가고 가장 늦게 나왔다. 호흡법도 모르는 상태에서 배운 것을 5분 먼저 도착해 반복하고 끝난 뒤 5분 반복하고 나왔다. 그렇게 한 달 지나니 내가 수영을 가장 잘했다. 1993년 둘째를 낳고 산후 조리 할 때 전후로 6개월 쉰 게 전부였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획득하는 장면을 본 뒤에는 마라톤을 시작했다.
“몬주익 언덕을 넘은 황영조 선수가 결승선을 통과한 뒤 쓰러졌다. 인간한계에 도전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혼자 올림픽공원과 남한산성을 뛰어 다녔다. 수영장 가기 전에 먼저 한 두 시간 달렸다.”
둘째를 낳고는 집 근처인 올림픽수영장으로 옮겼다. 어느 순간 국가 차원에서 에너지 절약을 해야 한다며 모든 수영장이 수요일에 문을 닫았다. 그 때 자전거를 배웠다.
이명숙 씨가 7월 26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프로사이클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일주일에 하루 수영 못해 안타까웠는데 올림픽 공원에서 자전거 교실이 열렸다. 그래서 자전거를 배웠다.”
“매일 새벽 달리기와 수영, 그리고 수요일과 토요일, 일요일엔 자전거를 탔다. 가끔 수영 대회에 출전하기는 했지만 대회에 출전하려고 하기 보다는 매일 운동하는 게 즐거움이었다. 집 주변 올림픽공원과 남한산성의 멋진 경관을 감상하며 달리는 것도 좋았다.”
이 씨는 1999년까지 이런 식으로 혼자 즐겼다. 1990년 대 말 외환 위기가 온 뒤 국내에서 마라톤대회 출전 붐이 일었다. 그해 하프코스를 완주했다.
“1999년 가을 춘천마라톤 공지를 보고 도전하고 싶어 등록했다. 같이 수영하는 분 중에 마라톤 하는 분이 있어 함께 훈련했다. 매일 저녁 10km를 달렸다. 춘천마라톤 가기 전에 제1회 하남 환경마라톤 하프코스를 완주했다. 또 충주 사과마라톤에서도 하프코스를 완주했다. 그 때 여자부 3위를 했다. 그리고 춘천마라톤을 완주했다.”
이 씨는 2000년 춘천마라톤에서 풀코스를 4시간45분에 완주한 뒤 본격적으로 마라톤에 빠져 들었다.
이 씨는 2001년 ‘100회 마라톤클럽’에 가입했다. 100회를 완주하겠다는 게 아니라 평생 마라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30번까지 완주하고 세지 않았단다. 그 즈음 이 씨는 자연스럽게 트라이애슬론(철인3종)으로 향하는 경험을 했다.
철인3종대회에서 수영을 마치고 나오는 이명숙 씨. 이명숙 씨 제공.
“2000년 여름 서울수복 기념으로 수영하고 달리는 ‘아쿠아애슬론’ 대회가 있었다. 무작정 한강을 헤엄쳐 건너고 싶어 참가했다. 그리고 좀 있으니 역시 서울수복 기념 철인3종대회가 있어 구경을 갔다. 새로운 세계였다. 그리고 2001년 4월 천안에서 달리고 자전거타고 다시 달리는 두애슬론 대회에 참가했다.”
독립기념관 주위를 5km 달리고, 40km 사이클, 그리고 10km 달리는 천안 두애슬론을 준비하며 좋은 인연을 만났다. 그동안 생활자전거를 탔던 이 씨는 전문 사이클이 필요해 서울 전역을 돌아다니며 체형에 맞는 사이클을 찾았다. 그러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프로사이클의 김동환 대표(57)를 만난 것이다.
“솔직히 사이클을 산다고 얘기도 안했다. 그냥 상담만 했는데 대회 1주일 남겨놓고 갔더니 사장님이 내게 맞는 사이클을 준비해 놓으셨다. 내가 다시 올 줄 알았다며….”
이명숙 씨가 사이클을 타고 질주하고 있다. 이명숙 씨 제공.
2001년 속초에서 열린 철인3종 올림픽코스에 도전해 완주했다. 얼마 뒤 경기도 이천 설봉유원지 철인3종 올림픽코스에서 여자 3등을 했다. 이 때부터는 마라톤대회에 출전하는 게 무의미했다. 철인3종에 나가면 수영과 사이클, 마라톤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1년 철원 철인3종 하프코스(수영 2km, 자전거 90km, 마라톤 21.0975km)에서 1위를 한 뒤 2004년까지 단 한번도 우승을 놓친 적이 없다. 우승하려고 한 게 아니라 무리하지 않고 내 페이스대로 달리면 1등이었다.”
이 씨는 당시 마스터스 철인3종계에서 ‘여자 철인’으로 불렸다. 2002년 철인3종 철인코스로 불리는 킹코스(수영 3.9km, 자전거 180km, 마라톤 42.195km)에 처음 도전했다.
“갑상선기능저하증이 있어 킹코스 완주할 수 있을지 두려웠다. 그 즈음 지리산 무박 종주 이벤트가 있었다. 그래서 도전했다. 종주에 성공하면 킹코스도 완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뛰고 걷고 힘들었지만 12시간에 완주했다. 아주 빠른 기록이라고 했다.”
한 철인3종대회에서 우승한 이명숙 씨. 이명숙 씨 제공.
2002년 여름 강원 속초에서 열린 철인3종 킹코스를 13시간에 완주했다.
“이번에도 인간의 한계를 못 느끼고 완주했다. 매일 모든 중목을 훈련한 결과였던 것으로 보였다.”
그해 100km 울트라마라톤에 도전해 12시간에 완주했다. 그리고 쓰러졌다.
“갑상선 기능이 정지됐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운전대를 잡을 힘도 없었다. 운동을 즐기고 그 기분에 취해 내 체력이 완전히 바닥 난지 몰랐다. 그 때부터 먹는 것에도 신경 쓰기 시작했다.”
2003년부터 보약이란 것을 먹기 시작했다. 비타민도 챙겨 먹었다. 잘 먹지 않던 고기도 먹었다. 운동을 계속 즐기려면 잘 먹어야 했다. 그렇다고 운동을 쉬진 않았다. 갑상선 질환은 무기력증이 수반돼 자칫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었다. 운동이 유일한 돌파구였다.
“운동 강도를 낮추고 철인3종은 올림픽 코스만 나갔다. 풀코스는 1년에 3개 대회만 출전했다. 운동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에 멈추진 않았다.”
사이클을 타고 질주하는 이명숙 씨(앞). 이명숙 씨 제공.
1년 동안 체력 회복에 집중 한 뒤 2004년 철인3종 꿈의 무대인 ‘하와이 철인3종 대회 킹코스’에 도전했다.
“2003년 통영 철인3종 대회에 출전했을 때 김동환 사장님이 나의 업힐 능력을 보고 훈련을 시켜준다고 불렀다. 아침마다 스피드 훈련을 했다. 그동안은 내가 앞에 서 있고 다른 분들이 뒤에서 받쳐줬는데 뒤에서 따라가며 떨어지지 않는 훈련으로 스피드를 키웠다.”
김동환 대표는 한국 최고의 사이클 선수 출신이다. 1981년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동아사이클대회에서 최우수신인상을 받았고, 1982년과 1984년 개인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1990년 현역에서 은퇴한 김 사장은 마스터스 사이클 활성화에 힘쓰고 있다. 그는 구자열 대한자전거연맹 회장,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은 물론 가수 김창완, 김세환 씨 등과 함께 사이클을 타며 조언을 하고 있다. 동호인들에게는 안전하고 저렴한 사이클을 공급하며 사이클 훈련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2014년 제주도에서 열린 철인3종 대회에서 우승한 이명숙 씨(오른쪽에서 두번째). 이명숙 씨 제공.
이씨는 2004년 8월 제주도 킹코스 대회에서 하와이 철인3종 티켓에 도전했고 여자 1등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세계 최고 권위의 하와이 철인3종 ‘철인코스’(수영 3.9km, 사이클 180km, 마라톤 42.195km)를 완주했다.
“12시간37분에 완주했다. 그동안 이 대회에 참가한 한국 여자 선수 중에서 기록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더운 날씨에 바람도 셌지만 최고의 대회를 무난하게 완주해 기분이 너무 좋았다.”
2005년엔 한 실업MTB팀 소속 ‘엘리트 선수’로 잠깐 활약하기도 했다.
“내가 사이클을 잘 타니 김동환 사장님께서 추천해주셨다. 하지만 나이도 가장 많은 상태에서 젊은 선수들과 경쟁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그동안은 내가 좋아서 운동을 했는데 결과만을 위해 매일 자전거를 타는 게 너무 괴로웠다.”
엘리트선수로 활약하며 받은 스트레스로 운동에 회의를 느껴 1년여를 쉬었다. 수영 자전거 마라톤. 사실상 모든 것을 포기했다. 2007년부터는 자격증을 획득해 동호인들 자전거 타기 교육을 시키는데 집중했다. 자전거로 4대강을 ‘12호’로 완주하는 등 자전거를 탔지만 수영과 마라톤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이 씨는 올 봄부터 다시 예전과 같이 운동을 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았던 것이다.
사이클을 타고 질주하는 이명숙 씨. 이명숙 씨 제공.
“내가 너무 처져 있어 보이니 큰 딸이 ‘다시 하와이 철인3종에 도전해보라’고 해서 운동을 시작했다. 그 티켓을 따려면 국내 선발전 철인코스에서 1위를 해야 한다. 그런데 예전 같이 훈련하다보니 부상이 왔다.”
전문가 진단 결과 몸의 밸런스가 깨졌다. 한동안 자전거만 타서 나타난 현상이다.
“솔직히 50대 중반까지만 해도 운동 안하다 2개월 몸 만들면 한 80%는 돌아왔다. 2017년 철인3종 대회에 2차례 출전해선 우승도 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2,3년 차이인데 이젠 너무 힘들다. 과거 내가 생각하는 훈련은 소화도 못 한다. 지금은 운동을 계속 하는데도 아직 몸이 50%도 회복이 안 됐다.”
이 씨는 각오를 새롭게 했다. 과거는 잊고 새롭게 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이젠 다시 꾸준하게 운동할 계획이다. 그리고 1년에 한 두 번은 나를 위한 도전을 하겠다. 그래야 평생 건강하게 스포츠를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