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방콕서 ARF 계기로 연쇄 다자·양자회담 화이트리스트 韓 배제 부당성에 공감대 형성 "외교적 협의 공간 좁아져…외교부 부담 커져"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태국 방콕에서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수출우대국 목록) 한국 배제에 대항하는 나흘 간의 연쇄 외교전 강행군을 마치고 3일 오후 한국으로 귀국했다.
강 장관은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등 아세안 관련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달 31일부터 이날 오전(현지시간)까지 방콕에 체류하며 대일(對日) 외교전을 펼쳤다.
강 장관은 이번 ARF를 계기로 열리는 십여개의 다자·양자회담에서 강 장관은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비롯한 일본의 수출규제가 일방적이고 자의적이며, 자유무역주의에 반하는 조치라고 누차 강조했다.
강 장관은 이 회의에서 “자유무역주의가 이 지역에서 도전받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아세안 국가들이 무역긴장 상황에 우려를 표하고, WTO에 구체화된 다자무역주의를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밝혀줘 감사하다”고 말했다.
고노 외무상은 이에 “일본의 수출 통제에 대한 필요하고도 합법적인 검토는 WTO(세계무역기구) 협정 등을 포함한 자유무역체제와 충분히 호환된다”며 “아세안 국가로부터 불평을 듣지 못했다”고 받아쳤다.
공방을 지켜본 다른나라 외교장관들은 한국의 입장에 공감했다. 특히 비비안 발리크리슈난 싱가포르 외교장관과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회의 공개석상에서 한국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며 고노 외무상을 머쓱하게 했다.
발리크리슈난 장관은 준비해온 발언문을 덮고 고노 외무상의 발언을 겨냥해 “화이트리스트는 줄이는 게 아니고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이 자유무역를 수호한다면 수출을 장려해야지 제한조치를 취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꼬집은 것이다.
이외에도 ARF를 계기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외교장관회의, 한-아세안 외교장관회의, 한-메콩 외교장관회의에서도 강 장관은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관심을 촉구했다.
강 장관은 한·미·일 외교장관회담에서도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연장 여부 재검토를 시사하며 일본 수출규제에 맞대응할 수 있다는 한국 정부의 사태 인식을 전달했다.
회담 직후 강 장관은 약식회견을 열어 “이 사태가 있기 전까지 우리가 끝까지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풀자는 이야기를 전했고, 미국도 같은 노력을 기울였다”며 수면 아래에서 한·일 무역갈등을 풀기 위한 미국의 관여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번 ARF 외교전은 일본의 수출규제가 부당하다는 공통인식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받는다. 아세안 외교무대에서 특정국가들을 놓고 공방이 오간 것 자체가 드문데다 여론이 한국 쪽에 기운 분위기가 감지돼서다.
그러나 이번 회의를 성공적으로 마쳤을 뿐이지 일본이 독단적으로 수출규제를 가하고 있는 상황 자체에는 변화가 없다는 점에서 외교부의 고민은 커질 전망이다.
외교부 고위당국자는 2일 방콕에서 취재진을 만나 “수출규제 조치로 인해서 외교적 협의 공간이 훨씬 더 좁아진 건 일본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라며 “ARF에서의 한판승을 평가해줘 감사하지만 외교부가 안고 돌아가는 부담은 훨씬 더 커졌다”고 털어놓았다.
일본은 한국에 대해 두 차례 수출규제를 단행한 정확한 근거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ARF 무대에 오른 고노 외무상도 유효한 논리를 제시하지 못했다.
고노 외무상은 “수산물 규제, 한일 기본조약, 수출통제는 별개의 이슈”라고 선을 긋고 “한국이 한일 기본조약을 다시 쓰려 한다”며 한국이 갈등을 유발했다고 강변하기만 했다.
강 장관은 이번 회의 공식비공식 석상에서 고노 외무상과의 만남을 통해 확인한 일본 정부의 완강한 태도 속에 외교적 해법을 마련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다음달 유엔 총회, 10월 아세안 정상회의,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한일 정상외교를 복원하기 위한 외교부의 어깨가 무거워진 것으로 보인다.
【방콕=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