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동인 강원대 초빙교수·직업학 박사
2000년대 초반 미국에 근무할 때 얘기다. 서울에서 명문 K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제법 큰 한국 기업의 뉴욕 주재원으로 일했던 친구가 이런저런 이유로 현지 정착을 선택하면서 세탁업을 시작했다. 너무 힘든 일이라 안쓰러운 마음으로 옆에서 지켜봤는데 그 친구의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한인 세탁업 종사자들의 모임에 나갔더니 대부분 S대 출신들로 내가 학벌이 가장 떨어진다”며 “여기는 체면보다 실속을 중시 여기는 곳인 만큼 뭐든 열심히만 하면 먹고살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 후 거의 20년이 지났다. 하지만 한국에선 아직 ‘양반은 얼어 죽을지언정 겻불은 쬐지 않는다’는 속담이 통용된다.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라는 얘기다. 직업 상담을 하다 보면 젊은 층은 많이 달라졌지만 중장년층은 별로 변한 게 없다. 특히 나름의 번듯한 일자리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일수록 더욱 체면을 내려놓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체면은 몸의 바깥 면(體面)이라는 뜻으로 주로 나에 대한 남의 평가에 관심을 두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체면을 유지하려는 욕구는 거의 세계 모든 문화권에 다 존재한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이고 평등지향적인 서구사회와 달리 신분과 관계를 중시하는 유교문화의 영향권에 있는 동양사회에선 체면문화가 더 강하게 작동된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어서 체면은 한국인의 사회적 행동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열쇠로 꼽힌다.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지만 항우울제 복용량은 꼴찌에서 두 번째라는 것도 결국 체면 때문에 정신과적인 치료를 받지 않는 것으로 해석될 정도다.
뿌리 깊은 체면문화를 버리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행복한 인생 2막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바로 이 작업이다. 그래야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확률이 높아진다. 중장년 퇴직자 체면 내려놓기의 핵심은 이들의 마음가짐을 ‘관리자 모드에서 실무 모드’로 바꾸는 것이다. 매우 본질적인 문제인 만큼 퇴직 교육에서 가장 중심에 두어야 한다. 상당한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은 과제다. 그러나 정책 당국이나 기업에서 시행하는 퇴직 프로그램은 주로 재취업 창업정보 등 실용적인 지식 전달 위주에 그치는 수준이다. 앙꼬 없는 찐빵만 만들어 내는 것 같은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다.
육동인 강원대 초빙교수·직업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