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노무현 정부 마지막 법무장관 지낸 정성진
정성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장이 2일 서울 중구의 개인 서재 청눌재에서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청눌은 ‘맑게(淸), 어눌하게(訥) 세상을 살자’는 정 전 위원장의 다짐이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2일 서울 중구에 있는 정 전 위원장의 개인 서재인 ‘청눌재(淸訥齋)’ 탁자 위에는 그의 고희 기념 논문집이 놓여있었다. 간행사는 박 장관이 썼고, 조 전 수석은 ‘검사의 수사지휘권 행사의 범위와 한계’라는 헌정 논문을 기고했다. 미국 유학 시절 정 전 위원장을 처음 만난 조 전 수석은 2016년 1월 저서 ‘절제의 형법학’을 친필 서명과 함께 정 전 위원장에게 보냈다.
―장관으로서의 박 장관을 평가한다면….
―조 전 수석이 후임 장관으로 거론된다.
“(장관이) 되는 게 확실합니까? 검사는 텃세가 심하고, 독특한 생리와 기질이 있다. 교수 출신인 조 전 수석이 검찰 개혁 문제에서 검찰을 지휘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신임 장관은 검찰 권력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대통령 요구를 반영해야 하는 부담과 책임이 큰 반면 윤석열 검찰총장은 법치주의 감시자로서 강단 있는 행보를 보일 수 있다. 자칫 법무부는 안 보이고 총장만 부각될 수 있다. 고생길이 훤한데, 굳이 장관은 안 했으면 한다. 한국의 형사법학자들은 대부분 독일에서 공부했는데, 조 전 수석은 미국에서 학위를 받았다. 꾸준히 논문을 내면 학계에 도움이 될 것이다.”
―2013, 2017년 검찰총장후보추천위원장을 두 번 맡았다. 윤 총장에게 당부할 얘기가 있다면….
“적폐청산 수사에서 능력을 발휘했지만 지금부터가 문제다. 수사만 잘하면 되는 서울중앙지검장과 달리 총장이 되면 장관, 법조계와의 관계가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대통령에 의해 특별한 선택을 받고 임명장을 받았다. 임명권자의 뜻에 충실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불식시켜야 한다. 총장의 직무 수행이 자칫 대통령의 뜻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지금처럼 인사권이 대통령에게 있고 청와대를 통해야 한다면 검찰 독립은 요원하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성패도 인사권에 달렸다. 공수처장 인사를 대통령 뜻대로 한다면 검찰권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고 악용될 수 있다.”
―검찰 인사 독립을 위해 필요한 대안은….
“재조와 재야 법조인, 건전한 비판 의식을 가진 시민들과 시민대표가 참여해야 한다. 다만 이들을 어떻게 선정할 것인지 고민하고, 외국 사례 등을 모아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검경 수사권 조정에 대한 개정안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다.
―패스트트랙 고발 사건에 대한 수사 방향에 관심이 높다.
“국회 안에서의 몸싸움 자체가 타기(唾棄)할 만한 작태다. 정치적 타협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검찰에 넘겨 불필요하게 사법적으로 해결하려 해놓고 수사에는 불출석하며 협조하지 않는 것은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나타낸다.”
―최근 검찰 인사에서 공안통 검사의 퇴조가 뚜렷했다.
“(인사는) 항상 절제와 균형의 문제다. 문재인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공안과 노동사건을 많이 맡아 검찰에 대한 선입견 또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공안의 의미가 변하긴 했지만 국가적 특수성도 있고 여전히 남아 있어야 하는 부분이다.”
김영삼 정부 초기 옛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에 오른 ‘엘리트 검사’였던 정 전 위원장은 1993년 초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때 ‘상속받은 재산이 많다’는 이유로 검찰을 떠났다. 2004년 국민대 총장직을 마친 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 관저 만찬에 그를 초대했다. 노 전 대통령이 판사 생활을 마치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했을 당시 정 전 위원장이 부산지검에 근무했는데 이 시기에는 서로 일면식이 없었다.
“배석자 없는 독대였다. 노 전 대통령이 (사법시험 15년 선배인) 나를 초면에 ‘정 선배’라고 부르며 ‘물려받은 재산 때문에 옷 벗은 건 말이 안 되죠’라고 했다. 내심 고마웠다. ‘원망할 생각 없다’고 답하고 검찰의 수사권 지휘 문제, 반부패 업무 등을 얘기했다. 대통령이 아무 격식 없이 슬리퍼를 신고 문 밖까지 나와서 ‘안녕히 가시라’고 배웅을 하는데, 그날 일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열흘 뒤 부패방지위원장으로 발령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감사원, 국세청 등 주요 사정기관들이 모두 참여하는 반부패기관협의회를 정 전 위원장이 주재하게 하는 등 반부패 업무를 전담시켰다.
“부패방지위원장으로 갔을 때 이미 공수처 법안이 만들어져 있었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의 반대가 워낙 심해 무산됐지만 사실 공수처를 추진하기 위해 검찰, 학계에서 반감이 적었던 나를 데려간 것이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을 보좌하던 문 대통령이 이제 다시 추진하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그때 처음 알았나.
“부패방지위원회가 청렴위원회로 이름을 바꿔 청렴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 문 대통령은 대통령시민사회수석과 민정수석을 거쳐 비서실장이 됐다. 문 당시 실장이 법무부 장관직을 제의하더라. 후배들이 할 시기라며 고사했다. 한 달 뒤 다시 만나서 ‘후배를 밀어낸 게 아니라 전임이 사표를 써 공석이니 맡아 달라’고 요청하는데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노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을 비교하면….
“다르다. 두 사람의 관계가 특수하다. 노 전 대통령은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문 대통령을 높게 평가했다. 노 전 대통령은 주장을 빨리 드러내 대통령으로서는 고전한 부분이 있지만 인간적인 매력이 있던 사람이다. 문 대통령은 만날 때 허름한 식당 같은 데 가고 굉장히 소박하고, 담백한 분이었다. 사담을 안 했고, 정직하고 점잖은 분이었다.”
정 전 위원장은 2017년 퇴임을 앞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추천으로 대법원 양형위원장을 맡아 올 4월까지 사법부에 몸담았다. 정 전 위원장은 앞서 동아일보 칼럼을 통해 ‘법원의 세속화’를 경고한 바 있다.
“박근혜 정부 당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때부터 고위 법관이 방송위원회와 감사원, 국민권익위원회 등의 수장으로 뽑혀갔다. 우수한 법관이 반드시 우수한 행정가라고 할 수 없다. 행정부로서의 득실도 문제지만 사법부의 오염도 걱정됐다. 특히 사법부가 형사소송법 등 법원에 유리한 법 개정을 법무부를 거치지 않고, 의원입법 형식으로 하도록 교섭했다. 곪았던 문제들이 터진 것이다.”
―사법행정권 남용의 재발을 막을 대책은….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는 것이 헌법의 명문규정(제101조 1항)이지만 사법행정권의 과도한 확대는 자칫 사법의 정치화를 낳을 수 있다. 지난해 9월 ‘사법부 70주년 기념행사’에서 문 대통령이 사법부의 각성을 촉구한 것도 대통령은 선의였고, 옳은 말이지만 국민의 눈에는 (행정부의 수반이) 사법권에 대해 용훼(容喙·간섭)하는 일로 비칠 수 있다.”
―최근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받는 경우가 늘고 있다.
“직권남용으로 추상적 위험만 있으면 처벌 대상이 된다는 게 기존 판례 태도인데, 적용 사례가 많지 않다. (수사 기관이) 추상적 위험이 없는 것도 있다고 간주하고 기소할 수 있으니 우려스러운 것이다.”
검사와 대학총장, 법무부 장관, 대법원 양형위원장을 두루 거친 그는 “행복한, 분에 넘치는 경험을 많이 했다”면서 자신의 모토라며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소개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다(I hope for nothing, I fear nothing, I′m free.)’
● 정성진 전 법무부 장관은
△1969년∼1993년 4월 검사로 재직. 대검 중앙수사1·2과장, 대검 중수부장 역임
△1999년 12월∼2000년 12월 한국형사법학회장
△2000년 2월∼2004년 2월 국민대 총장
△2004년 8월∼2007년 8월 부패방지위원장
△2007년 9월∼2008년 2월 법무부 장관
△2017년 4월∼2019년 3월 대법원 양형위원장
인터뷰=정원수 사회부장 / 정리=신동진 shine@donga.com·김동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