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장관을 본 건 오랜 세월 해양문화를 조사해 온 필자도 처음이었다. 100여 척의 고등어 잡이 선단이 부산공동어시장 부두에서 남중국해로 줄지어 향하는 모습은 탄성을 자아냈다.
지난달 이 장면을 담고자 부산 출장길에 올랐다. 여장을 풀 겨를도 없이 부산공동어시장으로 갔으나 태풍 다나스의 영향으로 출항이 하루 연기됐다. 어선에서 그물 손질을 하던 선원을 마주쳐 대화를 나눴다. 직업군인으로 살다 20여 년 전 선원이 된 72세 노인이었다. 고등어 어획 상황을 물었더니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많이 잡혔는데 요즘은 그 때의 절반에도 못 미쳐요. 게다가 일본과의 동해배타적경제수역(EEZ) 협상이 4년째 결렬되는 바람에 고등어 어장까지 줄었으니….”
청나라와 일본이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힘겨루기를 할 때 바다 역시 각축장으로 변했다. 조청무역장정(1882년)이 체결되어 청나라에 평안도와 황해도 어장을 개방해야 했고, 조일통상장정(1883년)에 따라 전라, 경상, 강원, 함경도 해안은 일본의 차지가 됐다. 뒤이어 조선일본양국통어장정(1889년)이 체결되면서 조선의 연안 3해리 이내에서 일본 어민의 합법적인 조업이 가능해졌다. 그 결과 제주도 해안은 황폐화했다. 머구리배라 불리던 일본의 잠수기어선이 제주 해역에서 조업을 했는데 1893년에 127척을 시작으로 1907년에는 300~400척으로 늘었다.
청일전쟁(1894년) 이후에는 우리 바다가 일본 어민의 독차지가 됐다. 1895년 한반도 남해안으로 진출한 일본 멸치잡이 선박이 190척에 달할 정도였다. 선단을 조직한 일본 어민들은 고등어, 멸치, 조기 등을 싹쓸이했다. 1920년대 일본인들은 통영 욕지도를 중심으로 500여 척의 건착선과 290여 척의 운반선으로 고등어를 잡을 정도로 마구잡이 어획을 이어간다. 일본은 이미 기선과 다양한 어구어법을 쓰고 있는 반면 우리 어민들은 돛단배나 노 젓는 배를 이용하고 있었다.
한 세기가 지난 현재, 우리 원양어선의 경쟁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 됐다. 1957년에 한 척으로 시작된 한국의 원양어업은 62년이 지난 현재 세계의 대양 곳곳에 진출해 일본, 중국, 스페인 등 해양 대국들과 당당히 경쟁하는 위치가 됐다. 방파제에서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위풍당당하게 나아가는 100여 척의 어선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봤다. 오욕과 영광으로 응축된 한 세기의 해양역사가 가슴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