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청구서 들고온 美국방장관
“문재인 대통령과 한반도의 현재 안보 도전들(security challenges)에 대해 논의한 것은 매우 생산적인 관여(productive engagement)였다.”
마크 에스퍼 미국 신임 국방장관은 9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예방한 지 한 시간도 안 돼 트위터에 이 같은 글을 올렸다. 이번이 첫 방한인 에스퍼 장관은 이날 문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이 필요하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일 갈등과 미중 분쟁, 북한의 도발 재개 등 한미 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힌 가운데 안보청구서를 내민 미국의 압박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날 청와대를 찾아 문 대통령을 30분간 면담한 에스퍼 장관은 “취임한 지 12일이 됐다. 첫 번째 해외순방으로 인도태평양 지역을 정했는데, 이는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번영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청와대는 전했다. 에스퍼 장관은 또 자신의 삼촌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인연을 소개하면서 “공동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 한미 관계가 앞으로 더욱 발전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에스퍼 장관이 ‘공동의 희생’을 강조한 것은 방위비 증액 필요성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이 전체 주한미군 주둔 비용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 트럼프 대통령이 7일(현지 시간) 방위비 협상 시작을 선언하고, 다음 날 미 국무부가 “(한국의) 더 많은 방위비 분담을 바란다”고 밝힌 데 이어 이날 미국의 안보수장이 직접 청와대를 찾아 증액 필요성을 전하면서 트럼프 행정부가 사흘 연속 릴레이 압박에 나선 셈이다.
하지만 에스퍼 장관이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만난 자리에서 좀 더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전달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지난달 방한한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정 실장을 만나 48억 달러에 이르는 미국의 주한미군 주둔 비용 명세표를 제시하며 “한미 정상 간에 정리해야 될 문제”라는 취지로 방위비 인상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미국이 이르면 이달 시작될 한미 간 새 방위비 협상은 ‘백악관 대 청와대’의 구조로 끌고 가려 한다”고 했다.
청와대와 국방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 중거리 미사일의 한국 배치 문제는 아예 언급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에스퍼 장관이 문 대통령과 정경두 국방부 장관에게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정 장관에게는 이에 더해 ‘호르무즈해협에서의 항행의 자유’를 강조한 만큼 본격적인 분위기 조성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에스퍼 장관은 정 장관과의 회담에선 “미 국가방위전략상 인도태평양 지역은 미국의 우선순위 구역”이라고도 했다.
이날 에스퍼 장관을 수행한 주요 당국자들도 대중(對中) 강경파 일색이었다. 랜들 슈라이버 미 국방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도 자타가 공인하는 ‘대중 매파’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미 태평양사령관 시절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남중국해 인공섬 인근에 군함을 진입시키는 ‘항행의 자유’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북-미 비핵화 협상 재개 논의도 이뤄졌다. 문 대통령은 에스퍼 장관에게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에스퍼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6월) 판문점 회동은 역사적 사건이었다”며 “북-미 대화의 조기 재개를 기대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