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황러가 사는 법 ④ 30대 중반까지 대출금 갚아야 하는 세대에서 확산 대기업 직원들도 본업 살리는 자영업에 뛰어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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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차 직장인 박모(29) 씨의 말이다. 박씨는 일찍 퇴근하는 날이나 주말이면 오토바이를 탄다. 근사한 레저용 오토바이가 아니다. 7년 전 대학에 막 복학했을 때 친한 선배가 물려준 배달용 110cc 오토바이다. 금·토요일 저녁에는 이걸 타고 배달대행업체에서 일을 받아 용돈벌이를 한다. 그는 “아직 일이 손에 익지 않았다. 지금은 교통비를 버는 수준이긴 한데, 매달 나가는 대출 이자를 보면서 조금이라도 갚아나가야겠다 싶어 쉬는 시간을 포기했다”고 밝혔다.
회사에 다니면서 퇴근 후 대리운전, 배달, 아르바이트 등으로 돈을 벌겠다고 나서는 ‘투잡(two job)’ 수요층. 과거에는 주로 가난한 가장이 이에 해당했으나 요즘에는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사회초년생도 이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학자금 대출을 떠안은 채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도 서러운데, 임금도 적다. 급여가 오르는 속도보다 물가가 오르는 속도가 빠르니, 내 집 마련의 꿈이라도 꿔보려면 하나의 수입원으로는 역부족이다.
과외 및 서비스 중개 어플리케이션 ‘숨고’(왼쪽) ‘탈잉’. [탈잉 홈페이지 캡처]
대다수 직장인이 두 종류의 직업을 원하지만, 이 중에도 선호하는 유형이 있었다. ‘취미 및 특기를 활용한 재능형 투잡’(33.7%)이 가장 인기가 많았다. ‘주말 등 쉬는 시간을 이용한 아르바이트형 투잡’(27%), ‘본업의 기술을 활용한 투잡’(20%), ‘은퇴 및 퇴직에 대비한 창업형 투잡’(17%)을 꼽은 응답자도 많았다.
직장인 임모(27·여) 씨도 지난달부터 주말 과외 강사로 나섰다. 취업 후 처음으로 서울로 올라와 열심히 일했는데 1년 만에 모아놓은 돈을 전부 날릴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고르고 골라 전세방을 하나 구했으나 집주인이 파산하겠다고 나서 전세금을 떼일 처지에 놓인 것이다. 임씨는 소송해서라도 전세금을 받아낼 작정이다. 이 소송비용을 마련하겠다는 생각으로 휴일도 반납한 채 또 하나의 직업을 갖기로 결심했고, 중국에서 2년간 유학하며 딴 어학자격증으로 과외시장에 뛰어들었다. 대학 입시제도 변화로 과외를 받으려는 중고교생은 많이 줄었지만, 과외를 원하는 직장인은 제법 있는 편이다.
임씨가 학생을 만나는 수단은 ‘탈잉’ ‘숨고’ 같은 중개 애플리케이션(앱). 탈잉은 대학생 과외 중개업체와 비슷하다. 튜터로 등록한 사람들로부터 첫 1시간 수업료를 중개료(수수료)로 가져간다. 단발성 수업일 경우 수업료의 20%를 중개료로 받는다. 숨고는 방식이 약간 다르다. 탈잉이 말 그대로 튜터와 학생을 연결하는 서비스라면, 숨고는 교육 이외에 다른 서비스도 제공한다. ‘숨어 있는 고수’라는 이름에 걸맞게 고객이 필요한 서비스를 올리면 재야의 고수들이 해결할 수 있다며 견적서를 보내는 방식이다. 이 견적서를 보낼 때 ‘크레딧’이라는 내부 사이버머니를 사용해야 하는데, 숨고는 이를 통해 수익을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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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초부터 지금까지 김씨가 회사에서 받는 세후 월 실수령액은 300만~350만 원이다. 연봉으로 따지면 4200만~ 4500만 원 수준. 취업포털 잡코리아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대기업의 평균 초임 연봉은 4060만 원으로, 김씨는 명실상부 고연봉자다.
하지만 야근 수당을 받아도 내 집 마련은 쉽지 않다. 집값이 연봉보다 훨씬 가파르게 오르기 때문. 종합부동산포털 부동산114 집계에 따르면 2013년 서울 아파트는 3.3㎡당 평균 1630만 원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5월에는 2542만 원으로 900만 원가량 올랐다. 같은 기간 대기업 신입사원 연봉은 3695만 원에서 4060만 원으로 300만 원 정도 상승했다. 단순하게 계산하면 2013년 당시에는 대기업 신입사원이 1년 연봉을 모두 모으면 아파트 약 7.6㎡(2.3평)를 살 정도였지만, 지난해에는 연봉으로 사들일 수 있는 규모가 약 5.3㎡(1.6평)로 줄었다.
주52시간 근무제 시행 이후 김씨가 다니는 회사에선 야근마저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유급 야근’이 없어졌다. 업무량은 그대로라 근무시간 안에 다 끝낼 수 없고, 퇴근시간 이후에 일한다 해도 수당을 받을 수 없었다. 김씨는 “(주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고 첫 주에 야근 수당 결재를 올렸더니 바로 반려된 데다, 상사에게 불려가 ‘눈치가 없느냐’며 혼났다”고 털어놓았다.
주말이 되면 김씨와 친구들은 각자 개인용 컴퓨터(PC)를 켜고 홈페이지를 만들기 시작한다. 점심때쯤 만나 각자 진행 상황을 확인한 뒤 의견을 조율한다. 핵심 작업은 주말에 대부분 해두고, 의뢰인으로부터 수정 요청이 들어오면 평일 퇴근시간 이후에 조금씩 고쳐나가고 있다. 김씨는 “학자금 대출 없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1억 원을 모으기는커녕, 아직도 대출금을 갚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 없는 회사 생활에 제2의 직업 기웃
김씨는 최근 다른 꿈을 꾸고 있다. 회사 일보다 두 번째 직업에 전념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18개월을 준비해 어렵게 대기업에 입사했다. 하지만 태업을 일삼는 일부 상사나 불합리한 의사결정 과정을 보면서 사내문화에 실망하는 날이 늘어났다. 회사에서 어떻게 버틸지 생각하기보다, 언제든 회사를 나갈 수 있는 계획을 세우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노무법인 사무실의 경우 사회초년생보다 10~20년 차 직장인의 투잡 문의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한 관계자는 “최근 겸직 금지 조항에 대해 묻는 30, 40대가 늘어났다. 주말 프리랜서 활동으로 버는 돈이 일정액을 초과해 사업자등록을 하고 싶은데, 사규에 있는 겸직 금지 조항 때문에 등록이 어렵다는 문의다. 하지만 판례상 근무시간 외 시간은 사생활 범주이기 때문에 그 시간대의 프리랜서 활동은 징계 사유가 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직장인 유모(38) 씨는 동생과 서울 근교에 PC방을 차렸다. 동생은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에 전념하며 평일 아르바이트생을 관리하고, 유씨는 주말에 출근해 자리를 지킨다. 유씨는 “본업이 PC 관련 일이라 조금 저렴하게 설비를 갖출 수 있었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온라인 오픈마켓의 발달로 ‘홈페이지 없는 쇼핑몰’에 도전하는 직장인도 많다. 직장인 정모(36) 씨 역시 얼마 전부터 아내와 오픈마켓을 준비하고 있다. 실제로 유튜브에 ‘오픈마켓’을 검색하면 성공 사례와 주의해야 할 점 등을 쉽게 알 수 있다. 정씨는 “외벌이 근로소득만으로는 퇴직 전까지 서울에서 내 집 마련은 불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도 최대한 소득원을 늘려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201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