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인생에 대한 확신, 도그마에 갇혀 黃만의 새 메시지 못 만들면 더 큰 위기
이승헌 정치부장
얼마 전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주변 인사에게 전화를 했더니 긴 한숨이 들렸다. 계속 말이 없기에 전화가 끊긴 줄 알고 “여보세요?”라고 되묻기도 했다.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요즘 한국당 사람들이 황 대표에 대한 걱정이 많다. 황 대표를 간판으로 내년 총선과 2022년 대선을 치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황 대표의 대선 주자 선호도 추이도 이런 걱정을 부채질한다. 지난주 리얼미터 조사에선 2월 취임 후 처음으로 20%대가 무너졌다.
황 대표와 함께할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그의 정치적 감수성, 콘텐츠 부족을 문제 삼는다. 엉덩이 댄스 논란을 시작으로 청년들에게 아들의 취업 스토리를 버젓이 전한 게 대표적이다. 취임 6개월이 다 되도록 내세울 정치적 상품이 없다는 말도 들린다.
그런데 황 대표 걱정할 때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감수성, 콘텐츠 부족이 정말 문제의 핵심일까. 이걸 갖추면 보수의 고민은 사라질까.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우선 감수성. YS 이후 최근 한국당이나 그 전신 정당 출신 대표나 대통령 중 정치적 감수성이 탁월했던 사람이 있었던가. ‘대쪽 총리’ 이회창부터 이명박 박근혜까지, 감수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감수성은 진보세력들이 비교 우위를 갖는 영역. 초 단위로 돌아가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에게 보수세력은 어지간해선 만족스러운 감수성을 선보이기 어렵다. 콘텐츠는 정치인들을 비판할 때 가장 ‘편하게’ 꺼내 드는 소재. 하지만 DJ, JP 이후 여야를 막론하고 콘텐츠에 자신 있어 할 정치인은 현재 대한민국에 없다. 걱정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조차 별 생각 없이 레토릭과 관성에 사로잡혀 있다.
“총체적 안보 붕괴 상황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 표명과 대국민 사과를 촉구한다.” 황 대표가 북한의 미사일 도발 직후인 10일 긴급회의에서 한 말이다. 안보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할 법한 말이다. 이 정도 메시지로는 문재인이라는 ‘정치 함수’에서 종속 변수를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미국의 현 집권세력이 보수인 만큼 워싱턴으로 가서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겠다고 했으면 어땠을까.
사람들이 집권세력에 아쉬워하는 걸 파고들어 그 대안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겉돈다. 대통령 비서를 법무부 장관으로 보내는 내로남불이 저급하다면 비난을 넘어 보수만의 품격을 궁리해야 한다. 미국 보수의 상징인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1984년 73세로 재선에 도전했을 때 월터 먼데일 민주당 대선후보(당시 56세)와의 TV토론에서 나이를 문제 삼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너무 젊고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정치적 목적으로 선거 기간 중 이용하지 않겠다.” 먼데일도 웃어 버렸고, 선거는 이걸로 끝났다.
물론 사람은 잘 안 바뀐다. 국무총리와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지낸 성공한 자기 인생에 대한 확신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으면 거기까지다. 황 대표 혼자 다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은 당도 그의 변화를 도와야 한다. 아직도 친박 비박 타령하며 팔짱 낀 채 황 대표가 쓰러지길 기다리거나 벌써 비대위를 거론하는 건 보수세력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 상황에서 황교안이 좌초하면 혼자만 망할 것 같은가.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