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남달리 불행했던 삶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학 역사에 발자취를 크게 남긴 여성이 있습니다. 멜라니 클라인입니다. 오스트리아 출생으로 우여곡절 끝에 헝가리, 독일을 거쳐 영국 런던에 정착해 활동했습니다. 클라인 학파는 영국, 남미, 유럽, 그리고 북미 일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창시자 지크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손꼽히는 분석가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사람은 누가 뭐래도 자기가 관심 있게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클라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들과 살림에 치여 시골 마을에서 우울한 삶을 살던 그에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삶의 돌파구를 제공했지만, 클라인은 프로이트를 무조건 숭배하기보다는 그가 놓친 것을 파고들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분석하며 쌓은 경험과 경험을 기반으로 만들어낸 이론이 프로이트가 미처 다루지 못한 점들을 혁신적으로 보완해 주었기에 현대 정신분석학에서 클라인 학파의 위상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고 싶은 것만 보아도 좋은 결과가 있다면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보고 싶은 것만 본다면 보아야 할 것을 놓치고 전체를 못 보게 되기 쉽습니다.
나라와 나라의 관계에서도 부분 대상은 작용합니다. 어떤 나라도 절대적으로 나쁘거나 절대적으로 좋을 수는 없습니다. 국가의 이익이나 지도자의 마음먹기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그 나라 국민 대부분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나라에 투사된 부분 대상은 그 나라 국민에게도 번져 근거 없는 혐오감을 키웁니다. 특정 국가에 대한 국민의 생각은 가족, 사회, 국가에서 물려받은 메시지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카를 융이 창시한 분석심리학은 프로이트의 개인 무의식보다는 ‘집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 즉 대상에게 본인의 욕구를 투사하며 살아갑니다. 투사된 욕구가 충족되면 만족하며 흐뭇해하고, 거부되거나 충족되지 않으면 좌절하고 화를 냅니다. 분노가 지나치게 쌓이면 극단의 경우에는 그 대상을 없애 버리려고 애를 씁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섞여 살아야만 합니다. 내가 있어 남이 있고, 남이 있어 내가 있습니다. 여당이 있어 야당이 있고, 야당이 있어 여당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있으니 다른 나라가 있고, 다른 나라가 있으니 우리나라가 있습니다. 현실을 피하기는 쉽지만 해결책을 찾기는 어려워집니다. 나쁨과 좋음을 선명하게 둘로 나누면 당장 해결책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착각일 뿐입니다. 나쁨과 좋음을 같은 대상에서 찾는 일은 고단하고 부담스럽고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성장과 성숙에는 늘 고통이 따릅니다. 관계의 갈등 구조를 녹여 내려면 한 눈이 아닌 두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편 가르기를 통한 일목요연(一目瞭然)은 미성숙에서 나오는 부분 대상이라는 제목의 환상입니다.
포기는 쉽지 않습니다. 부분 대상이 주는 일시적인 만족감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든든해지는 아군이나 공격해야 할 적군이 사라지는 상실을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혹독하게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통합적으로, 안정적으로 맺을 수 있는 관계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내가 열광하는 연예인이나 내가 지원하는 정치인이 그냥 그런 사람이라면? 혹시 이미 알고 계신 것 아닌가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보고 싶은 것은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못 보며 살아갑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