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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집에 살며 식사-취미는 함께… 독거 외로움 떨칠 ‘코하우징’

입력 | 2019-08-17 03:00:00

[‘스마트 시니어’ 시대] <4> 요양원을 거부한 노인들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시니어 코하우징 ‘둔데르바켄’ 공용 라운지에서 주민들이 피카(FIKA·커피타임)를 갖고 있다. 둔데르바켄 제공

“저녁이 준비됐어요. 모두 식당으로 모여주세요!”

6월 13일 스웨덴 스톡홀롬 둔데르바켄의 저녁 시간. 오후 6시가 되자 앞치마를 맨 백발노인이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을 쳤다. 공용 응접실에서 삼삼오오 담소를 나누던 여러 사람들이 느릿느릿 식당으로 모였다. 서른 명 남짓한 이들이 줄을 서서 음식을 가져오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40분 이상이었다. 그래도 재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날 메뉴는 흰살생선과 으깬 감자. 소화가 편하고 부드러우며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이다. 사람들은 12개의 공용 탁자에 모여 식사를 했다. 여기저기서 웃는 모습이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 “생의 마지막까지 스스로 꾸려간다”

‘천둥의 언덕’이란 뜻을 지닌 둔데르바켄은 스웨덴의 노인 코하우징 시설이다. 60가구 70명이 모여 산다. 평균 연령은 70세. 공동 주거시설이지만 노인 코하우징은 요양원과는 다르다. 거주자들은 욕실, 부엌, 침실이 갖춰진 개인집에서 살되 식당, 도서실, 취미실 등을 공유한다. 무엇보다 거주자들이 돌아가며 식사와 청소 당번을 맡는 자율 형태로 운영된다. 그래서 노인들을 돕는 직원을 따로 고용하지 않는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 꾸려나간다’는 원칙을 따른 것이다.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고령화로 늘어나는 홀몸노인 문제를 해결하고, 이들의 삶의 질도 높이기 위해 1980년대부터 ‘코하우징’을 개발했다. 코하우징이 늘면 국가가 지원하는 도우미(helper) 서비스에 진입하는 시기가 늦춰져 노인 복지 비용도 함께 줄어든다.

기자는 이날 취재를 위해 둔데르바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곳에서 6년째 거주하는 레나 라피두스 씨(72)는 저녁 식사가 끝나면 방으로 돌아가 ‘나만의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17평(56m²) 규모에 작은 발코니가 딸린 라피두스 씨의 집은 혼자 살기에 안성맞춤. 침실 1개와 서재로 쓰는 작은 작업실이 있다.

라피두스 씨는 미혼이다. 나이가 드니 몸이 아프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누군가 곁에 없을 것이란 생각에 코하우징을 택했다. “문만 열고 나가면 이웃들이 있어 외롭지 않아요. 말동무가 필요하면 공용 공간에 갑니다. 집에 돌아와 문을 닫으면 완전히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고요. 혼자 살되 외롭지도 않죠.” 그는 여생을 코하우징에서 보내겠다고 말했다.


○ ‘따로 또 같이’ 나이 드는 생활

저녁 식사 후 둔데르바켄 거주자 대부분이 자신의 공간으로 흩어졌지만 일부는 공용 공간에서 시간을 보냈다. 편안한 실내용 원피스 차림으로 TV 뉴스를 보던 이레네 바우만 씨(79)도 그중 한 명. 그는 둔데르바켄에서 다섯째 안에 드는 고령이지만 식사준비와 청소는 예외 없이 함께한다. “거동이 불편하면 앉아서 수저를 닦거나 차 준비를 하는 등 쉬운 일을 맡으면 돼요. 모두 같이 나이 들어가고 있으니 누가 일을 더하거나 덜하는 것에 대한 불만은 없습니다.”

둔데르바켄 거주자들은 하루를 보내면서 모였다 흩어졌다를 자유롭게 했다. 오전 11시, 1층 라운지에서 열리는 핀란드식 커피타임 ‘피카(Fika)’는 하루 중 둔데르바켄이 가장 소란스러워지는 시간이다. 거주자들이 돌아가면서 간단한 간식과 커피를 준비하고, 누구든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 자신과 가족의 암 투병 이야기, 건강에 좋은 음식, 손주 자랑 등이 단골 소재다.

이날 주제는 ‘난청(難聽)’. 이날 피카에 참석한 9명 중 2명이 보청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난청이 얼마나 진행돼야 보청기를 사용하는지, 어느 회사 보청기가 착용감이 좋은지를 두고 얘기를 나눴다.

피카 후 거주자들은 취미방에서 다른 거주자로부터 뜨개질이나 악기 연주 등을 배운다. 건물 지하 사우나도 즐긴다. 이들은 공용 공간도 자신이 사는 집의 일부라고 생각하기에 인테리어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여러 사람이 모이다 보니 의견이 안 맞아 큰소리가 날 때도 있다. 그럴 땐 거주자들의 지도부 격인 ‘신뢰 그룹’이 중재에 나선다.


○ 만들기 어려운 게 유일한 단점

노인 코하우징은 이웃 나라 핀란드에도 있다. 하지만 스웨덴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지방정부인 ‘코무네’가 주거 정책을 주도하는 스웨덴에선 월세를 내는 임대형 코하우징이 다수다. 반면 핀란드에서는 매매형이 대세다. 매매형은 건물을 짓기 전부터 거주자를 모집해 각자 한 채씩 구입하는 방식이다. 공용 거실, 소파의 종류, 벽지 색깔 등 모든 의사결정을 다수결로 한다.

기자는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 있는 코하우징 로푸키리와 코티사타마 두 곳도 방문했다. 둘 다 매매형 시설이다. 가장 작은 평형인 38.5m² 방에서 거주하는 비용이 약 2억2700만 원. 비슷한 시설의 인근 주택 시세와 비교하면 거의 비슷하거나 약간 저렴한 수준이다. 각자 집에 대한 소유권이 있지만 새 거주자를 들이려면 기존 거주자들의 면접 통과가 필수적이다.

‘마지막 전력 질주’란 뜻의 로푸키리는 핀란드 매매형 코하우징의 원조로 통한다. 1999년 친구 사이였던 할머니 4명이 “요양원에 사는 부모님처럼 늙고 싶지 않다”고 결심한 뒤 시작했다. 핀란드가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정부가 노인 복지비용을 삭감해 요양의 질이 떨어진 것도 한몫했다. 이들은 헬싱키시에 노인 공동 주거시설용 부지를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다. 건설이 완료된 2005년까지 시와 부지 매입 임대, 지원 범위까지 줄다리기하듯 협상했다.

로푸키리를 벤치마킹해 2015년 완공한 코티사타마는 이 과정을 2년으로 줄일 수 있었다. ‘항구 옆 집’이라는 뜻의 코티사타마는 200m만 걸어 나가면 바다를 접하는 곳에 있다. 전망이 좋아 선호도가 높다. 특히 핀란드가 정보기술(IT) 강국이라는 점을 반영하듯 코티사타마는 코하우징 전용 애플리케이션(앱)까지 만들었다. 반상회 일정, 모임 시간, 정기 건강검진 가능 날짜 등을 모두 앱으로 공유한다. 코티사타마의 홍보담당자 겸 거주자 마리우트 헬미넨 씨(71)는 “처음에는 코하우징 개념이 생소해 헬싱키 시 공무원들이 결정을 망설였다. 높은 만족도로 유명해지자 이제 타국 공무원을 직접 데려와 우수 복지 사례로 소개한다”고 귀띔했다.

거주자들은 “코하우징 시설이 기존 요양원 등에 비해 비용절감 효과는 있지만 건설 과정이나 유지에 정부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둔데르바켄에 거주하는 스웨덴 코하우징연합회장 울리카 에게뢰 씨(58)는 “스톡홀름은 주거난으로 청년들이 도심에서 밀려나 문제가 되고 있다. 세대 갈등 없이 코하우징을 활성화하려면 정부가 전 세대의 주택 수요를 고려해 노인을 위한 주거 공간 등 다양한 세대를 위한 코하우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시니어 코하우징에 잘 맞을까? 체크리스트>
1. 60세 이상으로 결혼 출산 이혼 등 가족 구성원 변화가 적다
2. 하루종일 돌봐야 할 어린 자녀나 손주, 부모님이 없다
3. 1년에 석 달 이상 집을 비우지 않는다
4. 6~8주에 1주씩 공동 조리, 공용 공간 청소를 할만한 체력이 있다
5.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게 즐겁다
6. 살 집보다 함께 일상을 나눌 이웃이 더 필요하다
7. 나이 들어도 친구를 사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 ‘예’라고 응답해야 시니어 코하우징에 잘 맞는 사람.

○ 고독사 없는 코하우징

코하우징에 거주하는 노인들은 ‘죽음’과 일상적으로 조우한다. 하지만 고독사는 없다. 식사시간에 나오지 않거나, 공용 공간에서 보이지 않으면 이웃들이 살펴보다 병원에 데리고 간다.

로푸키리 거주자 64명 중 3명이 지난해 사망했다. 이곳에서 10년간 살아온 비테 아스켈룬드 씨(70)에게 “가까운 이웃의 죽음을 계속해서 접하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지난해 제작한 달력을 내밀었다. 백발의 노인들이 각 달의 테마에 맞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달력이었다. 봄엔 봄의 정령을 흉내 내며 흰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모습을, 여름엔 노란 우산을 쓰고 일렬로 걷는 모습을 촬영했다. 달력 촬영을 맡은 노인이 지난해 세상을 뜬 3명 중 1명이라고 했다. 아스켈룬드 씨는 “이 친구가 죽었을 때 모두 와인을 들고 1층에 모였다. 달력을 넘기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까지 식사 준비와 청소를 스스로 했다. 이곳은 인생이란 달리기의 ‘마지막 동반자’를 만들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거듭 강조했다.

스톡홀름·헬싱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