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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아파트 주민’ 대통령이 퇴임한다면[오늘과 내일/정원수]

입력 | 2019-08-21 03:00:00

문 대통령 이후는 아파트 세대… 퇴임 뒤 귀촌하는 시대 열리길




정원수 사회부장

KTX울산(통도사)역에서 내려 자동차를 타고 30분쯤 남쪽으로 가면 경남 양산시 매곡동이 나온다. 한적한 시골 마을의 언덕에 담벼락이 유난히 높은 문재인 대통령의 사저(私邸)가 있다. 이곳은 문 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거제, 성장기를 보낸 부산과는 좀 떨어져 있다. 부친 산소가 있다는 게 문 대통령과 양산의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청와대’ 근무를 끝낸 2008년 3월경 낯선 이곳에 자리 잡았다.

2017년 5월 대통령 취임 12일 만에 문 대통령은 첫 휴가를 여기서 보냈고, 그 뒤로도 자주 찾았다. 알려진 것만 하더라도 지난해 9월 미국 뉴욕 순방 직후, 성탄절 연휴에 사저를 찾았다. 올해는 설 연휴에 이어 지난 주말에도 머물렀다. 문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 당시 “퇴임 뒤 양산으로 귀향해 여생을 보내겠다”고 했다.

만약 그 약속이 지켜지면 불과 50∼60km 떨어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의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와 함께 전직 대통령 사저가 같은 광역단체에 하나 더 생기게 된다. 전직 대통령 2명이 임기 뒤 고향에 정착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경남의 자산이라고 볼 수 있다.

퇴임 대통령 사저라고 하면 적어도 여의도 정치권에선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5년 단임 대통령제 아래에서 대통령 집권 4년 차 때는 대통령 퇴임 후 사저가 정치권을 늘 시끄럽게 하는 소재였다. 전직 대통령의 거처는 국가경호시설이어서 청와대가 국가정보원 등과 협의를 하지만 국회에서는 다른 전직 대통령과 비교해서 경호시설 등을 마련하는 비용을 놓고 티격태격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터를 매입하는 데 관여한 당시 경호처장은 특별검사 수사를 받고 형사 처벌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삼성동 주택을 팔고, 내곡동 사저를 짓는 과정이 순조롭지 않았다. 문 대통령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소모적인 논쟁을 끝내는 방법을 미리 생각했으면 한다. 현재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선 후보 상위권으로 자주 거론되는 정치인의 주택 보유 현황을 살펴봤다. 역대 대통령과 달리 단독 주택을 소유한 정치인은 거의 없다. 이낙연 국무총리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오랜 아파트 거주자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아파트를 팔아 지금은 무주택자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요즘도 경기 성남시 분당의 아파트에서 출퇴근한다. 40, 50대 이하는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진짜 아파트 세대’가 더 많다.

훗날 아파트 주민이 대통령이 된다면 퇴임 뒤 사저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경호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단독 주택과 비교해 아파트 경호는 허점이 너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전직 대통령이 산다는 이유로 아파트 전체 동을 매입하는 건 비용 부담이 너무 크고, 매입 성사 여부도 불투명하다. 아파트로 복귀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최근 오거돈 부산시장을 만나 “퇴임 대통령 사저를 유치하는 게 어떠냐”고 하자 “부산은 너무 좁고, 땅값이 비싸다”고 답했다. 맞는 말이다. 대도시는 전직 대통령의 사저를 유치하는 데 있어 경쟁력이 크게 떨어진다.

전국의 지자체가 경쟁해서 전직 대통령 사저를 유치하면 어떨까. 반드시 고향이나 성장했던 곳이 전직 대통령의 거처일 필요는 없다. 서울 생활이 좋다면 여주나 강화도는 어떤가. 홍천이나 청주 등도 수도권 근접거리다. 과거 유학자처럼 지리산, 소백산 자락 명당에 터 잡고 인생 후반부를 보내도 좋을 것 같다. 제주도와 같은 섬이나 목포, 포항, 강릉 같은 해안가도 경쟁력이 있다.

전직 대통령이 지방에 직접 살면서 국가균형발전의 중요성을 체험하고, 현직 정치인에게 그 중요성을 설파한다면 그보다 나은 지방분권대책이 있을까 싶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