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놈이 더 나쁜 놈을 응징하는 영화 ‘추격자’. 쇼박스 제공
‘공정성’이 갖는 딜레마다. 공정하게 하려는 의도와 달리 매우 불공정해 보이는 결과를 낳았으니 말이다. 아닌 말로 심사위원들이 상의해서 이 영화에 2개, 다른 영화에 2개, 또 다른 영화들에 1개씩 상을 ‘배분’했더라면 ‘황금비율’이라는 놀라운 평가를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공정성과 기회 균등을 기하기 위해 기업 공채에서 블라인드 면접을 시행하니 명문대생이 더 많이 입사하게 되는 기막힌 결과도 공정성이 갖는 딜레마다. 사람들은 공정한 과정을 좋아할까, 아니면 공정해 보이는 결과를 좋아할까. 뚱뚱한 큰아들에겐 과자를 2개, 마른 작은아들에겐 과자를 1개 주는 게 공정할까, 아니면 똑같이 하나씩 주는 게 공정할까.
평소 우린 딜레마적 상황을 왕왕 경험한다. 딸에게 “서울대만 들어가 준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그 다음은 네 멋대로 살아라”라고 했더니 막상 서울대에 들어간 딸이 머리를 미친 분홍색으로 물들이고 ‘클럽 죽순이’가 되어 집에도 잘 안 들어올 때 아빠가 처하게 되는 상황이 딜레마이고 “내가 햇볕정책의 산증인”이라며 북한에 우호적인 인사임을 자처해온 국회의원이 북한의 단거리 미사일 훈련을 살짝 비판한 뒤 북으로부터 “설태 낀 혓바닥을 마구 놀려대며 구린내를 풍기었다”라는 창조적인 비난을 받은 상황도 딜레마적이라 할 수 있다. 영화 ‘극한직업’에서 범죄조직을 소탕하려 조직 인근에 통닭집을 위장 개업한 형사들이 장사가 너무 잘돼 ‘형사 때려치워야 하나’ 고민에 빠지는 것도 딜레마이며 잠재력 있는 미래 인재를 뽑겠다는 대입 수시모집에 부모 잘 둬서 찬란한 스펙을 쌓은 애들이 들어가는 상황도 역시 딜레마다.
정의와 법 사이에도 이런 딜레마가 존재한다. 보고 나면 사흘 동안 찝찝해 출근하기가 싫어지는 영화 ‘추격자’의 주인공 김윤석이야말로 딜레마적 인물이다. 법을 수호하며 먹고사는 직업인 형사를 하다 지금은 법을 어기며 먹고사는 포주로 창업(?)한 김윤석은 우여곡절 끝에 자기 종업원을 살해한 연쇄살인마 하정우를 응징한다. ‘나쁜 놈’이 ‘훨씬 더 나쁜 놈’을 추격해 속 시원하게 패버리는 모습에서 나쁜 놈이 은근히 ‘나쁘지 않은 놈’, 아니 ‘좋은 놈’, 아니 ‘정의로운 놈’처럼 보이기도 하는 딜레마가 바로 이 영화가 품은 수준 높은 장난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배트맨이야말로 딜레마적 인물 아닐까. 억만장자인 그는 밤이면 박쥐 옷을 입고 악당들을 처단하지만 사회 야경꾼을 자처하는 배트맨의 이런 사적 행위는 정작 법에 의거하지 않은 불법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배트맨을 응원한다. 불행히도 법과 정의가 충돌하는 딜레마적 상황이 온다면, 정의가 법을 이겼으면 하는 불온한 희망을 우린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을 지킨다”는 사람은 존경하지만 “법적으론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대 때려 주고 싶어진다.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