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용 경제부 차장
다소 부풀려진 몇 년 전 에피소드지만 원청업체는 납품단가 후려치기로 부당 이익을 챙기려 하고 하청업체는 어떻게든 대기업에 물건을 대야 먹고살 수 있는 후진적 산업구조를 보여준다. 이 구조를 뜯어보면 공급 대상인 부품의 종류와 양을 결정하는 쪽은 수요자인 대기업이다. 주문에 따라 공급자인 중소기업들은 일본으로 달려가서 남들보다 먼저 부품을 들여오든지 시설을 사서 매뉴얼대로 제품을 만든다. 이런 수급 구조에서 중소기업은 기술력 있는 장인(匠人)보다 고용과 해고가 쉬운 싼 노동력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1세대에서 기술을 축적 못한 중소기업은 2세대로 넘어가면서 더 이상 비전을 찾지 못하고 기업을 처분해 현금화할 생각부터 한다. 하청업체 2세들 중 금융 전공자가 많은 데는 이런 배경도 있다.
부품 소재의 수급이 수직적으로 이뤄지는 시장에서는 기술 개발보다는 도급-하도급 울타리 안에 있는 기득권층이 모두 ‘지대(렌트·독점이익)’를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지대의 크기에 차이는 있겠지만 이 울타리 안에서는 중소기업이라고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크고 작은 기득권 전쟁을 벌이면서 카르텔은 복잡하고 적대적인 공생관계로 변질된다. 대기업들이 국내 소재 부품 기업을 키우지 않고 외국에서 재료를 갖다 써서 일본의 수출 규제를 초래했다는 정부와 정치권의 인식은 대-중소기업을 강자와 약자 관계로 단순하게만 보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제보복 이후 한국의 전략은 글로벌 공급망이 깨지고 일본 기업도 부정적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설득 작전이었다. 논리적이었지만 파장이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기술 개발을 계속하는 게 국익만이 아니라 사익(社益)을 위해서도 낫다는 인식이 우리 안에서부터 퍼져야 한다. 기술 개발 중인 기업이 경영권을 승계할 때 상속세를 일단 보류해주고 2세가 독자 기술로 상장한 뒤 기업을 팔 때 세금을 한꺼번에 부과하는 인센티브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은 반드시 기술적으로 독립할 것이라는 메시지는 북받치는 감정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정책에서 나온다.
홍수용 경제부 차장 legm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