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T 크리스천 밀러, 켄 암스트롱 지음·노지양 옮김/392쪽·1만8000원·반비
“끔찍한 폭력의 실재를 견디기 위해 여성들은 눈을 돌려버린다. 스탠드 불빛만 노려보거나 벽에 걸린 그림만 보고 있기도 한다. 아니면 눈을 감아버린다. 이는 곧 여성들이 강간범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할 수 있고, 범인이 입은 옷 방 시간 주변 환경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성폭력 범죄는 피해자가 거짓말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받는 범죄다. 성폭력을 당했다고 말하는 순간, 수사기관부터 주변 지인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모든 사람이 한 번쯤 피해자의 말을 의심한다. 그래서 성폭력은 강력범죄 가운데 신고율이 가장 낮은 범죄다. 설령 재판까지 가더라도 피해자는 낯선 사람들이 가득한 법정에서 자신이 당한 성폭력의 세부사항을 공개해야 하며 자신과 멀지 않은 곳에 앉아있는 범인을 보며 증언해야 한다.
이 책은 2008년 8월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임대아파트에 홀로 사는 18세 여성 마리가 침입자에게 강간당한 사건을 추적한 탐사보도 르포르타주다. 당시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피해자의 반복 진술 사이에서 사소한 모순을 의심했다. 결국 마리는 협박에 가까운 경찰들의 취조에 겁에 질려 진술을 철회했고, 허위 신고죄로 기소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약 3년 뒤. 타 지역에서 연쇄강간 행각을 벌이던 진범이 잡히고 나서야 마리의 강간 신고가 사실이었음이 밝혀진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들은 방대한 서면 자료와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했다. 수사의 중심에는 갤브레이스와 헨더샷이라는 두 여성 형사가 있었다. 그들은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보통 경찰들이 걸리기 쉬운 ‘피해자다움’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갤브레이스는 피해자의 말을 무조건 믿지도 의심하지도 않고, 우선 경청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객관적이고 냉철한 탐사보도는 마치 추리소설처럼 흡인력 있게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성인지 감수성’ ‘2차 가해’ 등이 이슈가 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