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회 인촌상 수상자]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사는 5일 인촌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33회를 맞은 올해 인촌상은 교육, 언론·문화, 인문·사회, 과학·기술 4개 부문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4명을 수상자로 선정했다. 심사는 부문별로 권위 있는 외부 전문가가 3, 4명씩 참여해 7월 초부터 8월 말까지 진행했다. 수상자들의 소감과 공적을 소개한다.》
▼ 이론-경험 겸비한 대표적 교육철학자 “교육은 백년대계 의미 명심해야할 때” ▼
[교육]이돈희 서울대 명예교수
이돈희 서울대 명예교수(82)는 4일 인촌상 수상 소감으로 “교육계의 일원인 저는 누구보다도 이 상을 무겁게 느낀다”고 밝혔다. 그는 “수상 사실을 통보받은 뒤 내가 인촌상을 감당할 정도로 교육 분야에 기여한 것이 있었는지 되돌아봤다”며 “앞으로도 인촌의 정신을 기리고, 교육 발전을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명예교수는 한국 교육학계에서도 대표적인 교육철학자로 평가받는다. 30년 동안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를 지내며 교육철학과 교육정의론 등을 연구했다. 그가 가르친 제자들은 전국 각 대학에 포진해 한국 교육계의 핵심 학자로 성장했다.
더불어 이 명예교수는 이론과 현장을 모두 아우른 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본인 스스로 “초등학교 외에 거의 모든 교육현장을 경험했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교수를 지내며 김대중 정부 때인 2000년 교육부 장관에 임명됐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3년간 한국교육개발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2013년에는 숙명여대를 운영하는 숙명학원 이사장을 맡아 재단 경영에 참여했다. 2016년부터 2년 동안 전문대인 김포대 총장을 맡기도 했다.
자립형사립고의 주창자였던 이 명예교수는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자율형사립고의 일반고 전환 정책에 대해 쓴소리를 남겼다. 그는 “교육은 학생들의 다양한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정책은 이를 역행하고 있다”며 “획일화된 교육 방식으로는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다양한 분야의 영재를 발굴하고 양성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사립학교 정책에 대해서도 “사학마다 각자의 건학 이념이 있는데 이를 지나치게 평준화시키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이 명예교수는 “교육에 정치 이념이 개입돼 정권에 따라 주요 정책이 수시로 바뀌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기 어렵다”며 “교육을 ‘백년대계(百年大計)’라고 불렀던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고 교육계에 당부했다.
● 공적
서울대 교육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미국 웨인주립대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4년부터 30년 동안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를 지냈다. 한국교육개발원장(1995∼1998년), 교육부 장관(2000∼2001년), 민족사관고 교장(2003∼2008년), 숙명학원 이사장(2013∼2017년) 등을 역임했다. 1980년대 이후 근대 학문으로서 한국의 교육철학을 이끈 주도적 학자이면서 동시에 장관과 고교 교장, 학교법인 이사장 등의 직책을 맡아 자신의 교육철학을 현장에 접목시켰다. 자립형사립고 도입을 직접 발의해 현실화하기도 했다.
▼ 역사-폭력 탐구… 한국문학의 지평 넓혀 “박경리-박완서 선생님과 같은 상 기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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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문화]한강 소설가
인촌상 언론·문화 부문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49)은 최근 인터뷰에서 “인촌상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 번 자세히 찾아봤다”며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그는 1993년 11월 계간지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는 정교한 시선으로 세상을 탐구하는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역사와 폭력성을 깊이 있게 사유한 작품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2016년 장편 ‘채식주의자’로 영국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에서 수상하면서 한국 문학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맨부커상은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한국인으로서 처음 이 상을 받은 그는 “혼자서 감당하기 버거운 시간이었던 것 같다. 밀려드는 업무를 차분히 잘 헤쳐 나가자는 생각뿐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어 “그 뒤로 (집필 활동을 위해)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려 노력한다”고 덧붙였다.
소설을 진지하게 대하기 시작한 건 중학교 3학년 무렵. 대학 시절 습작기를 거쳐 출판사에 취직한 뒤 3∼4시간씩만 자면서 글을 썼다. 뜨거움이나 열정보다 끈기로 소설을 써왔다고 자평했다. 그는 현재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2015년), ‘작별’(2018년)에 이은 ‘눈’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을 집필 중이다.
“‘여수의 사랑’에 실린 단편을 쓰던 사회 초년병 시절부터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을 쓰던 2015년 초까지 비슷한 밀도의 끈기로 작업해 온 것 같습니다. 최근 4년여 동안은 개인적 위기를 지나고 있어서 더 강한 끈기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세간의 기대에 대한 부담감은 느낄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 수년째 붙들고 있는 이 소설은, 지극히 사적인 방식으로 돌파해야 하는 어떤 것입니다.”
올 6월 서울국제도서전을 끝으로 그는 칩거해 집필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의 머릿속은 오직 소설 생각뿐이다. 그는 “지금까지 쓰고 싶은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왔다. 그 결과는 통제 밖의 영역”이라며 “오직 쓰는 과정에 있는 사람만이 작가이며, 다행히 지금 쓰고 있으니 나는 아직 작가”라고 말했다. 이따금 그는 소설 밖을 꿈꾼다.
“전에 만들고 불렀던 노래들을 담담하게 다시 녹음해보고 싶습니다. 그 사이 새로 만든 노래들도 넣고요. 음반 제목은 오래전 보았던 연극의 대사인 ‘안아주기에도 우리 삶은 너무 짧잖아요’로 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백일몽일 뿐이지만 언젠가 그런 여유가 찾아올 수도 있겠지요.”
● 공적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1993년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 ‘검은 사슴’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와 소설집 ‘노랑무늬 영원’ ‘내 여자의 열매’ ‘여수의 사랑’,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등을 냈다.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리문학상, 이상문학상, 오늘의 젊은예술가상,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채식주의자’의 영미판이 해외 언론에서 호평을 받고 2016년 맨부커상을 수상하면서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 ‘몽골제국의 역사’ 연구서 세계적 성과 “중앙유라시아史로 韓 문화채널 확장” ▼
[인문·사회]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64)는 수상 소식을 듣고 숙연해졌다고 했다. 김 교수는 국내 중앙유라시아사 연구의 선구자이자 몽골제국사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연구 성과를 쏟아낸 석학이다. 몽골제국의 제도와 정책을 분석해 제국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유지된 단일한 실체로 입증했다.
중앙유라시아에서 명멸한 여러 민족의 역사를 그들의 입장에서 조명하기 위해 중국인의 시각이 반영된 한문 사료가 아니라 원 사료를 분석했다. 언어 공부부터 시작했다. 1980년대 중앙유라시아는 거의 공산권이어서서 현지 방문도 불가능했다.
“15∼18세기 위구르 말은 미국에도 가르치는 분이 없어 독학했지요. 중세 텍스트는 현대어 사전에는 없는 어휘가 있어 여러 사전을 찾아보기를 되풀이했습니다.”
그가 해독할 수 있는 언어는 몽골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튀르크어, 위구르어 등 10개 정도 된다.
세계에 흩어진 사료를 수집하는 것도 난관이었다. 요즘은 웬만한 사료의 사본을 온라인으로 구할 수 있지만 2000년대 초만 해도 현지에 가서 사본을 만들어야 했다. 김 교수의 서울대 연구실에는 유라시아 각지의 박물관에서 복사하거나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해 인쇄한 자료들이 빼곡하다.
한때 중앙유라시아를 누비며 찬란한 문화를 만들었지만 현대에는 위축됐거나 다른 나라의 구성원으로 살았던 유목 민족의 역사가 객관적인 시선에서 되살아났다. 19세기 중반 중국 서북부 신장(新彊)지역 무슬림의 혁명운동을 다룬 연구서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사계절)은 미국 스탠퍼드대가 ‘Holy War in China’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몽골제국과 고려’(서울대출판부), 몽골제국의 역사를 페르시아어로 기록한 ‘집사(集史)’의 역주서, 교양서 ‘황하에서 천산까지’(사계절),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돌베개) 등 여러 저서를 냈다. 2017년부터는 국제역사학회 한국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정년을 맞는 그는 연구에 집중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가 세계 학자 약 40명의 글을 모아 출판하는 ‘몽골제국사’의 책임편집을 계속하는 한편 몽골제국의 군사, 민정, 교통, 통신 등 ‘제국적 제도’를 몽골인의 관점에서 총괄하는 책을 쓸 계획이다.
“우리의 문화적 관심과 지식이 지역적으로 편향돼 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중국 일변도였고, 현대에는 서구 일변도지요. 신라부터 조선 초까지 우리의 문화 채널은 초원과 유라시아 멀리까지 연결돼 있었어요. 우리 문화의 또 다른 근원이자 역동성의 원천이죠. 중앙유라시아사 연구를 통해 우리의 문화적 채널도 다양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 공적
중앙유라시아사 연구에 40년 가까이 천착하며 이 분야 연구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유목 소수민족의 역사를 그들의 주체적인 시각으로 서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6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로 부임해 제자들을 양성했다. 1993년 중앙아시아연구회를 창설했고 2002년 중앙아시아학회장을 지냈다. 대중성을 갖춘 여러 저술도 이 분야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환기하고 지적 영역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 데이터로 미래 예측하는 통계학 석학 “길을 잃은 시대,불확실성 줄여나갈것” ▼
[과학·기술]박병욱 서울대 통계학과 교수
박병욱 서울대 통계학과 교수(58)는 한국 통계학계를 대표할 수 있는 학자 중 한 명이다. 전 세계 통계학자 및 통계 전문가들의 국제기구인 국제통계기구(ISI)의 부회장에 8월 취임했다. 지난해에는 세계 수학자들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세계수학자대회에서 통계학자로는 이례적으로 초청강연을 했다. 학문적 성과를 수학자들도 인정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박 교수는 “통계학자로서 한국사회에서 큰 상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데이터의 시대지만, 역설적으로 데이터를 다루는 통계학이 설 자리가 그렇게 넓지만은 않다는 생각에서다.
“통계에 대한 조예 없이 데이터를 분석하고 다루는 사례를 많이 봅니다. 이에 따라 왜곡된 사실이나 잘못된 정보가 퍼지기도 하지요. 전문가인 통계학자에게 검토만 받아도 되는 일인데, 잘 안 됩니다. 몸이 아플 때 의사를 찾는 일은 상식이 됐지만, 통계 분석이 필요할 때 통계학자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의사를 찾지 않는 사람은 자신만 손해지만, 통계학자를 찾지 않는 사회는 그 피해가 사회 전체에 미친다. 그 폐해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게 박 교수의 생각이다. 데이터의 양이 방대해졌고 복잡해진 반면 옥석을 가리기는 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잘못된 분석이나 여론조사에 의한 가짜뉴스도 횡행한다. 포털 뉴스사이트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잘못된 정보에 따른 편 가르기 싸움으로 늘 시끄럽다.
그는 “길을 잃은 시대에 통계와 데이터 분석으로 진실을 찾아나가고자 한다”고 했다. 데이터에서 법칙을 찾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이론을 연구한다. 특히 데이터가 추출된 곳(모집단)의 특성과 관계없이 데이터를 분석하는 ‘비모수 추론’이 그의 전문 분야다.
박 교수는 2017년 대선 데이터를 분석하는 연구를 하기도 했다. 전국 지역구별로 평균 나이와 교육 정도, 주거지 시세, 보험료 액수, 직전 총선에서의 정치 성향별 후보자 득표수 등을 바탕으로 대선에서 지역구별 득표를 예측하는 모형을 개발했다. 모형 예측치는 실제 득표 결과를 비교하니 정확히 들어맞았다.
“사람들은 흔히 나이가 많거나 돈이 많으면 보수화되고, 교육수준이 높으면 진보 성향을 띤다고 생각합니다. 통계로 검증해 보면 조금 다릅니다. 나이는 정치 성향과 연관성이 있는데, 경제력은 영향이 없더군요. 교육은 오락가락합니다. 일정 수준의 교육을 받을 때까지는 보수 성향을 띠다가도 교육수준이 높아지면 진보 성향으로 돌아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는 “미래 예측은 틀릴 가능성이 있지만 그럼에도 통계학이 유용한 것은, 바로 그 불확실성을 계량화하고 조금이라도 줄여 나가려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 공적
고통스러운 이론 증명 과정을 마치고 그 내용을 논문으로 쓸 때 어떤 취미보다 큰 즐거움을 느낀다는 천생 학자다. 서울대 계산통계학 학사, 석사 학위를 받고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통계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교수를 거쳐 1988년부터 서울대 통계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통계학 분야 양대 학술지로 꼽히는 ‘미국통계학협회저널(JASA)’과 ‘통계학 연보(Annals of Statistics)’ 등에 발표한 논문 30여 편을 포함해 총 1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이설 기자 snow@donga.com·조종엽 기자 jjj@donga.com·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 제33회 인촌상 심사위원(가나다순)
▽교육 △위원장 김도연 서울대 명예교수·전 포스텍 총장 △위원 김경성 서울교대 총장, 김성훈 동국대 교수, 백순근 서울대 교수
▽언론·문화 △위원장 윤영철 연세대 미래캠퍼스 부총장 △위원 김은미 서울대 교수, 왕은철 전북대 교수, 최맹호 전 동아일보 부사장
▽인문·사회 △위원장 박찬욱 전 서울대 총장직무대리 △위원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이재열 서울대 교수
▽과학·기술 △위원장 국양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총장 △위원 김성근 서울대 교수, 김승환 포스텍 교수, 전호환 부산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