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 민간인 총기 수 100명당 120정 일상용품처럼 손쉽게 총기 구매… 총기 폭력 사망자 독일의 16배 NRA 막강한 로비에 규제법안 좌절, 시민단체들 대대적 규제 촉구 시위
전미총기협회(NRA) 본사 1층에 있는 총기박물관 간판 위에서 성조기가 휘날리고 있다. 이 박물관에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과 조지 부시 전 대통령 등이 NRA 인사들과 만나는 사진들이 걸려 있다. 페어팩스=이정은 기자 lightlee@donga.com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사방의 벽과 진열대를 빼곡하게 채운 총보다도 기자를 긴장시킨 건 카운터 뒤쪽에 놓인 총알들이었다. 언뜻 작은 분필상자처럼 보이는 총알 묶음은 20개짜리가 20달러에서 44달러 정도 가격에 판매되고 있었다. 총집과 총기 세척제 등 다른 액세서리 제품들과 함께 카운터 뒤쪽의 진열대가 모두 총알로 가득했다.
“외국인도 허가증만 있으면 총을 사도록 도와드릴 수 있어요. 총은 국적이나 인종에 상관없이 누구나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갖고 계신 비자 종류가 무엇인가요?”
○ 너무나 쉬운 총기 구매 및 사용
NRA 본사 내 총기 박물관에 다양한 크기의 총기 수십 정이 전시돼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유색인종 비하 발언이 쏟아지던 시점에 불법 이민자를 겨냥해 발생한 총격 사건으로 인종주의 논란까지 불붙으면서 총기 규제는 미 정치권의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총기 규제를 요구하는 시민단체들이 시위에 나서기 시작했다. 다음 주에 개회하는 의회는 관련 논의를 다시 본격화할 예정이다. 민주당 대선주자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면서 총기 규제는 2020년 미국 대선에서도 주요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에서 총기 규제는 말처럼 쉽지 않다. 수백 년간 총은 미국인에게 낯선 외부인과 야생동물의 위협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보호 수단으로 인식돼 왔다. 구글맵에서 총포상을 검색하면 집 근처에서 서너 곳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만큼 총기는 일상생활에 깊이 들어와 있다. 총기를 포함한 무기 소유는 미국 헌법(수정헌법 2조)에도 규정돼 있는 권리다.
사격 연습 중인 중년 남성 3명 외에 총기 사용법을 배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방음시설이 돼 있는데도 공기를 찢는 듯한 실탄 발사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했다. 챈이라는 이름의 카운터 직원은 “곰이나 사슴 사냥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부터 자신의 사격 실력이 녹슬지 않도록 정기적으로 연습하는 사람까지 다양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는 라이플 3정, 피스톨 3정을 합쳐 모두 6정의 총이 있다”며 웃었다.
○ 총기 규제를 가로막는 장벽들
총기 규제를 주장하는 단체 ‘행동을 요구하는 엄마들’이 “총기 폭력을 끝내자”는 팻말을 들고 시위하는 모습. 샌프란시스코=AP 뉴시스
총기 폭력 아카이브(Gun Violence Archive)에 따르면 총기 폭력으로 인한 사망자는 미국이 100만 명당 29.7명으로 캐나다의 6배, 독일의 16배에 달한다. 2012년 12월 총기 난사 사건으로 어린이 20명이 사망해 온 국민을 경악하게 만든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이후에도 현재까지 모두 2200건 이상 집단 총기 사건이 발생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총기 규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모습이다. 그는 엘패소 총기 난사 사건 이후 “의회와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면서도 정신질환자와 공격적인 비디오 게임, 소셜미디어가 주요한 원인이라고 지목했다.
하지만 잇따르는 총기 난사 사건은 규제 목소리에 힘을 싣고 있다. 총을 다시 사들이는 ‘바이백(buy back·재매입)’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공격용 무기로 분류되는 자동소총(AR) 같은 총기의 판매 규제는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정신질환자를 포함한 위험인물이나 전과자 등의 총기 구매를 금지하고, 필요시 총기를 압수할 수 있도록 규제를 강화하는 내용의 ‘적기법(Red flag laws)’의 의회 통과를 촉구하는 시위도 이어지고 있다.
시민단체 ‘브래디 캠페인(Brady Campaign)’은 4일 미 의회 앞에서 총기 규제 관련 법안들의 신속한 처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지난달 중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행동을 요구하는 엄마들’이 주최한 총기 규제 캠페인도 진행됐다. 또 다른 시민단체 ‘기퍼드’는 최근 75만 달러 규모의 캠페인을 시작했다.
○ 민주당 대선주자들, ‘총기와의 전쟁’
지난달 29일 퀴니피액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유권자의 72%가 총기 폭력을 막기 위해 의회가 추가 조치를 내놔야 한다고 답했다. CNN 등 언론들은 민주당 지지자의 93%가 찬성한 것과 함께, 총기 소유권을 강하게 주장해온 공화당 지지자의 찬성 비율도 50%에 이르는 대목에 주목했다. ‘기퍼드’ 활동가인 케이티 피터스 씨는 최근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에서 “총기 규제 강화에 나서는 것이 그저 옳다는 것 외에 정치적으로도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을 대선주자들은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힘입어 민주당 대선주자들도 총기 규제 공약을 속속 내놓고 있다. 민주당의 유력한 대선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총기 규제는 타협의 여지가 없는 사안이며, 계속 더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과 엘패소 출신의 베토 오로크 전 하원의원도 정부의 공격용 무기의 바이백 의무화 등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다.
입법 추진 과정이 탄력을 받을지는 미지수다. 9월 4일로 예정됐던 총기 규제 관련 논의는 허리케인 도리안 우려 때문에 연기됐다. 의회 관계자는 WP에 “이달 말쯤 일정이 다시 잡힐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NRA의 로비로 의회에 올라오는 총기 규제 법안들은 줄줄이 처리가 지연되거나 폐기되곤 했다. 그나마 과거와 좀 달라진 대목은 총기 규제 여론에도 꿈쩍 않던 월마트가 4일 공격용 권총 등 일부 총기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엘패소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진 현장이기도 했던 월마트는 미국 내 4750개 점포 가운데 약 절반에서 총기를 판매해 20%의 점유율을 보였던 곳. 한꺼번에는 아니더라도 조금씩은 변화의 가능성을 보고 싶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더 안심하고 살 수 있을 테니….
-페어팩스에서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