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여권 유효한가” 전화 걸었다 1000억 도박사이트 일당 덜미

입력 | 2019-09-06 03:00:00

태국대사관 주재 경찰에 위치 발각… 1년 넘게 도피하다 라오스서 체포
경찰, 석달간 해외도피 133명 검거




“제 여권이 아직 유효한지 궁금해서요.”

올해 2월 주태국 한국대사관에 여권이 유효한지 확인하려는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전화를 받은 경찰주재관은 A 씨(37)의 이름을 듣자마자 1년 전 태국에서 사라진 수배자를 떠올렸다. A 씨는 공범 3명과 함께 태국 방콕에서 1000억 원대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다 2017년 10월 태국 경찰에 검거됐다. 하지만 한국 경찰이 국내 송환을 준비하던 중 지난해 3월 태국 법원에 보석금을 내고 넷 다 사라졌다.

수사 경력 18년인 주재관은 A 씨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태연한 목소리로 신상과 현재 위치 등을 물었다. A 씨도 별다른 의심 없이 태국 국경지역의 한 지명을 언급했다. 라오스로 도피하려는 속셈임을 알아챈 주재관은 전화를 끊자마자 라오스 인터폴과 주라오스 한국대사관의 경찰주재관에게 알렸다.

라오스 경찰주재관은 A 씨 일당을 쫓기 위해 발품을 팔았다. 그는 현지 경찰과 함께 3개월간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 내 한인 밀집지역을 돌며 은신할 만한 곳을 수색했다. 결국 올해 6월 한인지역에 함께 숨어있던 A 씨 일당을 검거했다. 경찰은 A 씨를 보자마자 “당신들 데려오려고 애 많이 먹었다”고 했다.

5일 경찰청은 올해 6월부터 8월까지 인터폴과 함께 합동단속을 벌여 해외로 도피한 한국인 피의자 133명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이들에 의한 피해액은 1500억 원, 범죄 자금 규모는 약 1조2200억 원에 이른다. 한중일 및 아세안 9개국이 수사망을 바짝 죈다는 뜻으로 ‘타이튼 더 네트(Tighten the Net)’라고 이름 붙인 합동 프로젝트의 쾌거였다.

기지와 발품, 때론 설득도 필요했다. 국내에서 2017년 11월부터 지난해 1월까지 50억 원 규모의 사기 행각을 벌이다 사라진 B 씨(57·여)는 주필리핀 경찰주재관의 끈질긴 설득으로 붙잡았다. 인터폴 적색수배 중이던 B 씨는 올해 7월 홍콩을 출발해 필리핀 세부행 비행기를 탔지만 세부공항에서 입국이 거부됐다. 다시 홍콩으로 달아날 생각이던 B 씨는 현지 이민청 직원의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주재관과 마주했다. 경찰주재관은 “홍콩으로 돌아가도 입국 거부당한다. 하늘 위를 ‘핑퐁’하지 말고 한국으로 돌아가 죗값을 치르라”고 설득했다. 이 경찰관은 “B 씨가 탄 비행기가 무사히 이륙하는 것을 보고서야 마음이 놓였다”고 했다.
윤다빈 empty@donga.com·조건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