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은희경 지음/342쪽·1만4000원·문학과지성사 새 장편소설 펴낸 소설가 은희경
은희경 작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됐다. 다음 장편은 몸, 시간,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고 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세 번째 공주였다. … 그 상황에서 왜 비련의 여주인공을 흉내 내며 제풀에 도망을 치는 것일까. … 회피야말로 가장 비겁한 악이다. 애매함과 유보와 방관은 전 세계 소통에 폐를 끼친다.”
소설가 은희경(60)은 숙명여대 기숙사에서 보낸 시절을 흑역사로 기억한다. 스무 살 은희경은 미숙하고 소심해서 “쉴드를 쳐주기 힘들 만큼 엉망”이었다. 한 번은 짚어야 할 이야기인데 아무리 애써도 의미가 잡히지 않았다. 가슴앓이로 어느 날 울음이 터졌고, 그 순간 빛줄기가 스쳤다. 답은 현재와 과거의 관계에 있었다.
“자기변명이나 미화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과거를 바라보면 현재의 좌표를 제대로 읽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희진의 서늘한 시선을 빌려 유경이 과거를 다시금 되짚길 바랐습니다.”
유경과 희진 외에 소설에는 다양한 인물이 나온다. 학생운동에 적극적인 최성옥, 남을 교정하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곽주아, 혼자 있길 즐기는 책벌레 오현수, 허영심 강한 연애박사 양애란, 예쁜데 걸걸한 송선미 등이다. 긴급조치 9호 시절이었던 시대상을 세밀하게 복원하기 위해 건축물을 쌓듯 정교하게 캐릭터를 직조했다.
“인물마다 사회와 부딪히는 접점을 만들어 시절을 드러냈어요. 오현수는 집단의 틀에 침범당하는 개인성, 최성옥은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 김희진은 여성에 대한 편견에 각각 맞서죠. 현재로 이어지는 당대의 문제들을 인물을 통해 제시했습니다.”
청춘을 반성하는 마음으로 썼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젊은 독자들이 기성세대의 비애를 들여다봐 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는 “세상이 각박해지니 상대를 쉽게 속단하게 된다.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기성세대가 어떤 꿈을 꾸고 좌절해 왔는지를 그렸다. 문학으로 화해의 장을 열고 싶다”고 했다.
“읽고 쓰는 인생이 아니었다면 이기적이고 소심한 스무 살 무렵의 은희경으로 남았을 거예요. 소설 덕분에 타인과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었죠. 새벽에 책장에 햇빛이 비쳐 드는 걸 보면, 깨치고 표현하면서 산 지난 세월이 형편없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