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자립의 길’ 석학 좌담]부품소재, ‘빨리빨리’론 못키워 2~3년 쏟아부어도 추격 힘들어… 日경쟁력 100년 기업서 나와 상속 쉬워져야 기술 내공 쌓여… 장인정신 이어가게 도울 필요 日관계 회복돼도 정책 유지해야… AI-빅데이터, 미래 경쟁력의 기본 데이터 많은데 규제 탓 활용 못해… 4차혁명위 법안 여태 국회 계류
《일본이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수출 제한 조치를 했고, 한국도 일본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해 맞대응했다. 국내에서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벌어졌고, 한국 정부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결정을 내렸다. 일본의 수출 제한은 한국의 부품소재 산업과 기술 수준의 민낯을 드러냈다. 규제에 발목 잡힌 첨단산업 육성, 부실한 기초과학 투자, 그리고 창의성을 살리지 못하는 교육제도에 대한 자성이 이어졌다. 동아일보는 국내 부품소재 산업과 기초 과학기술 발전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석학 3명의 좌담을 마련했다. 지난달 26일 동아일보사에서 열린 좌담회에 김도연 전 포스텍 총장(현 서울대 명예교수), 오세정 서울대 총장, 정진택 고려대 총장이 참석했다. 세 사람은 재료공학(김 전 총장), 물리학(오 총장), 기계공학(정 총장)을 전공한 이공계 출신이다.》
Q 정부는 부품소재 산업의 연구개발(R&D)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당장 연구개발의 예비타당성조사까지 면제하겠다고 한다. 정부의 부품소재 산업 육성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 정 총장=과거에는 정부가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드라이브(추진)하는 방식이라면, 이제 어느 정도 경제 수준을 갖춘 시점에선 좀 더 디테일한 맞춤형 정책이 가능해야 한다. 우선 반도체 산업에 수많은 공정이 있고 일본과 미국 중국에도 수많은 부품소재 기업이 있다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에 국한해도 국내 교수님들조차 이러한 기업이 있다는 걸 모르는 게 현실이다. 모두 대기업 공정에 해당하는 반도체 설계와 생산, 회로 교육만 하고 있다. 결국 이렇게 교육받은 학생들은 당연히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만 가려는 구조다. 또 단순히 국산화에만 투자하기보다 해당 기술을 가진 기업을 정부와 기업 차원에서 주도해 인수합병(M&A)하는 시도도 있어야 한다. 중소기업이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국제 특허 분쟁 같은 분야에도 정부가 정보를 제공하고 교육할 수 있어야 한다.
▽ 오 총장=대학 연구실의 경우 연구를 위해 시약이나 장비를 쓸 때 아무래도 외국에서 나온 유명 제품을 쓰는 게 비싸지만 편하다. 국내 제품은 인지도와 사용률이 낮으니 잘 안 쓰게 된다. 그런데 얼마 전 일본 연구실을 둘러보고 놀란 것 중 하나가 미국산 장비보다 일본산 장비가 많다는 것이다. 물어보니 일본산 장비를 구입하면 정부가 보조비를 주는 방식으로 자국 기업을 지원하고 있다고 했다. 이처럼 표준화된 제품이 아닌 새로운 제품도 주저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인센티브를 줄 수도 있다. 정부가 연구개발을 지원하는 건 옳은 방향이지만 오늘날과 같은 국제분업 상태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전략적으로, 효율적으로 경쟁력 있는 부분을 찾고 끈기 있게 투자하는 것이 중요하다.
▽ 김 전 총장=모든 산업정책에서 일관성이 중요한 것 같다. 이번에 연구비 투자를 대폭 늘렸는데 일본과의 관계가 개선되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건 안 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건 기업가 정신이다. 새로운 분야 개발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실험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현재 국내에는 이를 막는 규제가 너무 많다. 또 소재 분야의 경우 중소기업 중심의 산업 생태계가 필요한데 현 상황에서 중소기업은 굉장히 불리하다. 일단 임금 수준이 열악하니까 인재가 가질 않는다. 대기업 잘못도 아니다. 수출의 3분의 2를 대기업이 맡으니까 돈을 많이 벌 수밖에 없다. ‘히든 챔피언’으로 불리는 강소기업이 전 세계에 3000개 정도 있는데 독일에만 1300개가 있다고 한다. 독일 전체 수출의 50%를 차지한다. 일본이 220개, 한국은 22개다. 독일 히든 챔피언의 대부분이 이른바 가족기업이다. 대대로 상속해 가며 경영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한국은 중소기업 상속이 매우 어렵다. 굉장한 걸림돌이다. 그러다 보니 기술이 쌓이지 않는 게 문제다. 대를 이어 장인정신이 쌓여가도록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스웨덴 등이 하는 것처럼 공익재단에 주식을 넘기고 경영권은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Q 정부는 수소경제와 인공지능(AI), 빅데이터를 혁신성장 3대 전략투자 분야로 보고 있다. 한국의 주력산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 김 전 총장=인공지능의 경우 요즘 중국이 나서서 미국을 따라잡겠다고 하고 있다. 이런 말이 있다. 미국과 중국의 인공지능 기술 격차가 얼마나 되는지 봤더니 12시간이다. 알고 보니 두 나라의 시차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중국이 하는 인공지능 투자의 10%도 못 하고 있다. 이를 어떻게 전략적으로 끌고 갈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반면 수소경제는 아직 토론의 대상이라고 본다. 2003년 미국에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2003년생 아이들은 첫 번째 차로 수소차를 탈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아직 현실화하지 못했다. 물론 현재로선 수소가 경제적이지 못한 연료이지만 앞으로 기술 등 여러 가지 측면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다만 수소경제 자체를 정부에서 밀고 나가는 행보는 굉장히 신중해야 한다.
▽ 정 총장=수소경제라는 표현 자체가 성립할 수 있을 만큼 기술적 준비가 돼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예산 투자가 적절한 방향으로 될지도 우려된다. 한쪽을 키우기 위한 목적으로 예산을 쓰겠다고 정하면 돌이키기가 쉽지 않다. 연료전지 자동차라든가 수소와 관련된 연구를 많이 하고 있지만 결국 수소로 인해 경제 전반에 도움이 될지가 중요하다. 올해는 사람이 달에 발을 디딘 지 50주년이다. 인류의 달 착륙을 목표로 가다 보니 우주기술 개발 과정에서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기술도 많이 나오게 됐다. 그게 극한 기술의 의미다. 높은 방향성을 보고 함께 갈 때 국가 경제도 다 같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수소경제에도 그 같은 가능성이 있을까.
Q 과거 학력고사 성적 최우수자들이 서울대 물리학과에 몰릴 때가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초과학 교육이 중요한 건 마찬가지인데 요즘은 어떤가.
▽ 오 총장=지금도 인기 학과에 몰리는 건 비슷하다. 요즘도 기초과학 분야에 흥미를 느끼고 찾아오는 학생들이 있다. 다만 전체 숫자가 줄어드는 건 문제다. 특히 화학이나 물리 전공자가 많아야 기초소재 분야의 좋은 인재가 나온다. 우수한 학생을 유인하기 위해선 장학금이나 이공계 전문연구요원제도(학문과 기술 연구 분야에서 일정 기간 종사하면 사회복무요원의 복무를 마친 것으로 보는 제도) 같은 인센티브가 주어져야 한다. 이공계 학과를 졸업했을 때 의미 있게 일할 수 있도록 독일의 ‘히든 챔피언’ 같은 회사가 많아야 한다. 하지만 그 길이 좁다면 학생들도 답답할 수밖에 없다.
▼“기업 장비-프로그램 대학 투입해 맞춤형 인재 키워야”▼
▽ 김 전 총장=이공계 전문연구요원제도는 굉장히 중요하다. 연구의 꽃봉오리는 박사과정 학생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뿌리째 뽑아서 다른 데에 심으면 꽃을 피울 수 없다. 국방은 이제 자기 능력을 다해 국가를 위해 노력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연구로 우리나라의 자연과학과 공학 발전에 기여하는 값어치를 인정해야지 ‘무차별 평등’으로 가지 말았으면 한다.
▽ 정 총장=시대가 바뀌어도 기초과학이나 수학은 모든 학문의 근간이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바뀌어도 교육에서 STEM(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수학·Math의 약자)이 언제나 중시된다. 미국은 유학생이 졸업하면 실무 트레이닝 기간을 준다. 일반적으로 1년을 허락하지만, STEM 쪽은 3년이다. 그만큼 미국에선 STEM 분야의 인력 수요가 많다는 것이다. 전공에 상관없이 모든 교육 분야에서 STEM의 근간을 배우도록 하고 있다. 최근엔 여기에 예술(Art)까지 결합해 STEAM이라고도 부른다. 전인적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입시를 위한 공부 외에도 대학 과정까지 STEAM이 교육돼야 한다는 걸 정부가 강조하고 관련 정책을 이끌어야 한다.
▽ 오 총장=대학에서 제일 부끄럽게 생각하는 문제가 산업 수요에 맞게 인력을 양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학의 학과별 정원이 있다 보니 학생들이 원하는 전공을 택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려면 수요자(학생)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컴퓨터공학과 수강을 원하는 학생이 많은데, 수강 인원은 제한이 있다. 부전공, 복수전공을 많이 개방해서 전공들을 넘나들며 공부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 특정 전공에 사람이 몰리더라도 가능한 자원을 최대한 투입해 해결해야 한다. 가르치는 사람 수가 부족하면 교수를 더 투입해서라도 강의를 개설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 정 총장=기업들도 대학이 배출하는 학생들을 채용하면서 ‘학생들이 준비가 안 됐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말만 하는 데 그치지 말고 기업이 대학교육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 장비를 지원하거나 프로그램을 제공해 주는 식으로 말이다. 미국 대학은 실험 실습실 곳곳에 기업의 로고가 붙어 있다. 예를 들어 제너럴모터스(GM)는 자사에서 쓰는 설계 프로그램을 학생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런 프로그램을 공부하고 졸업한 학생들이 GM에도 취업하지만, 산업계 전반에 진출하면서 전체적으로 수준이 올라가지 않겠나. 산학협력도 바뀌어야 한다.
▽ 김 전 총장=대학이 비난받을 일이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대학의 (재정적) 상황이 너무 어렵다. 특히 지역 사립대학은 기업으로 치면 파산했을 수준이다. 일본에선 정부가 사립대 교직원의 인건비 절반을 지원한다. 고려대와 자매결연을 맺은 일본 사립대 와세다대의 경우 정부로부터 900억 원을 지원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와세다대와 경쟁하라고 하기는 쉽지 않다. 지금까지 대학은 ‘배운 사람’을 내보냈지만, 앞으로는 ‘배울 사람’을 배출해야 한다. 우리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지금까지와는 완벽하게 다른 세상에 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제일 중요한 것은 창의력과 협력, 배려의 정신이다. 대학은 그런 측면에서 시장 기능을 접목해야 하는데 여전히 공급자 위주의 교육을 하고 있다. 공과대학만 하더라도 내가 다닐 때와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미국 스탠퍼드대 공대는 매년 1500명을 뽑는데, 그중 665명이 컴퓨터공학과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수용할 능력이 안 된다.
▽ 정 총장=스탠퍼드대 공대 건물이 크지 않은데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온라인’ 수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취업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전공을 택한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키워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현실에 맞춰 발 빠른 변화를 취하는 건 대학의 몫이기도 하지만, 국가 전체에서도 이런 물꼬를 어떻게 틀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Q 대학이 변화하려면 결국 입시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어떤 방향이 바람직한가.
▽ 오 총장=대학 입시제도가 너무 경직적인 게 문제다. 기계, 전산을 전공하려면 고교에서 물리2를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수능에서 물리2를 택하는 학생이 1만 명도 안 된다. 표준점수로 변환하다 보니 잘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경쟁하면 점수가 안 나오는 탓이다. 입시에 불리하니 물리2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서울대를 제외하면 물리2를 요구하는 대학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를 공부하지 않으면 대학에서 고생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강의를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한 별도의 수업까지 개설할 정도다. 이 문제를 절대평가로 바꾸든 제도를 바꾸든 해결해야 한다.
▽ 김 전 총장=수능은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오지선다’ 방식으로 정답을 뽑아낸다는 게 공정해 보일지 모르지만, 아이들의 창의성을 죽이는 것이다. 어떻게든 수능에도 주관식을 도입해야 한다. 급격히 바꿀 수는 없겠지만 5%, 10% 이런 식으로 늘려가다 10년이 지나면 50%는 주관식으로 해야 한다. 물론 주관식 평가점수를 못 믿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앞으로 인공지능이 채점하게 된다면 이런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공정성’이라는 가치 때문에 잃는 게 너무 많다. 다 똑같은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오면 어떻게 창의적으로 키우겠는가.
▽ 정 총장=미국은 객관적인 대학입학시험인 SAT가 있지만, 대학들이 에세이도 평가한다. 미국 대학의 입학처 홈페이지는 한국의 그것과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전형 일정과 제출할 자료 목록들이 적혀 있지만, 미국은 ‘학교가 바라는 인재상’에 대한 내용이 가득하다. 공통 에세이를 제출하라는 학교가 있고, 추가 질문에 대한 답을 적어내도록 하는 곳도 있다. 막연한 자기소개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이 언제인가’ ‘기숙사 룸메이트에게 나를 설명해 보라’는 식이다. 우리도 그렇게 바꿔 볼 필요가 있다.
▽ 오 총장=‘서울대에서 누가 A+를 받는가’라는 책을 보면 교수의 농담까지 받아 적는 학생들이 점수를 잘 받는다고 한다. 자기 생각을 해야 하는데 선생님이 가르쳐준 것을 외우는 방식에만 익숙한 학생들이다. 산업화 시대에는 지식 전수가 빨리 이뤄져야 하니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남과 다르게 해야 하는 때다. 생각의 훈련이 필요하다.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을 도입한 지 약 10년이 됐다. 제도도 계속 진화하는 것이라고 본다. 지금은 학생이 논문을 쓴 실적 등을 기재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문제가 있는 점을 차츰 줄여가고 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이게 아닌가 보다’ 하면서 자꾸 바꾸면 학생들이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제도를 빨리 바꿀수록 유리한 쪽은 이른바 강남 대치동이다. 그동안 선발 결과를 보면 학종으로 뽑을 때 더 다양한 학생들이 입학했다. 정시로 뽑으면 그렇게 다양하지 않다. 이런 결과를 바탕으로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게 맞다. 다시 수능으로 돌아가는 건 안 된다.
정리=곽도영 now@donga.com·김수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