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개념은 당시에도 논란이 됐다. 적을 초전에 제압하거나 공격적으로 싸우지 않고, 수세적인 전투를 벌이는 듯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살해되고 역적이 됐다. 그러나 놀랍게도 정도전의 정적들도 이 개념을 수용했다. 세종 대에 변계량이 진법을 개정했는데, 반대론자들에 맞서서 선수비 후공격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 후 문종의 교정을 거치면서도 이 개념은 살아남았다.
선수비 후공격 전술은 중무장 보병 전투 같은 백병 전력이 약한 대신 궁수와 기병, 둘을 결합한 궁기병이 최대 장점이었던 우리 군의 특성에 잘 어울렸다. 또 하나의 장점은 유연성이다. 전투는 파도와도 같으며 누구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공격만 있을 뿐 후퇴는 없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는 병사의 투지로 훌륭하지만, 전술이 그래서는 안 된다. 전술의 생명은 유연성이다. 적을 끌어들이고 감싼 뒤에 섬멸하는 것이 최고의 전투 기술이다.
정작 이 개념을 도입한 정도전은 정치에서 유연성을 잃었다. 명의 압송 요구, 거세진 정적들의 공격에 한 발자국이라도 밀리면 끝장이란 강박증이 생겼던 것 같다. 요동 공격을 추진하면서 정도전은 더욱 ‘하드’해졌다. 자신의 세력이 점점 축소되고 고립되어 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안타깝다. 그는 왜 자신이 한 말을 실천하지 못했을까.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