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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 종가 제사음식 10개 안팎 간소

입력 | 2019-09-11 03:00:00

[새로 쓰는 우리 예절 新禮記(예기) 2019]<8> 명문가들의 제사문화




지난달 15일 고성 이씨 임청각 종가의 제사상(왼쪽 사진). 가로세로 60×40cm 크기의 상 위에 10여 개의 음식이 올려졌다. 조율이시(대추 밤 배 감)가 집안 내력이지만 상이 좁아 반드시 순서를 맞추지 않는다. 약과와 유과 등 과자류도 한 그릇에 담는다. 전집에서 구입한 전과 대구포 대신 먹기 편한 오징어포를 올리는 등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30개가 넘는 음식을 올리는 화려한 제사상과 대비된다. 이창수 씨 제공

《추석 차례상에 올릴 음식 준비를 위해 시장에 갔더니 올해도 한숨부터 나옵니다. 배부터 시작해 사과 감 등 햇과일은 전부 가격이 올랐더라고요. 남편 동생 식구까지 고작 9명인데 차례상에 올릴 음식만 30가지가 넘습니다. 나물이나 국, 밥은 제사가 끝나면 바로 먹기라도 하지만 다들 손도 대지 않는 유과와 대구포는 매번 버리기 일쑤입니다. “조상님께 올리는 것이니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시어머니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하지만 시아버지께서 생전에 즐겨 드시지도 않던 느끼한 전과 산적 고기까지 꼭 올려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제사상은 얼마나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건가요?》

8월 15일 오전 11시 서울 동작구의 한 아파트. 고성 이씨 임청각(臨淸閣·보물 제182호)파의 종손인 이창수 씨(54)의 집 거실에는 신문지 한 장만 한 작은 상 4개가 나란히 놓였다. 가로세로 60×40cm 정도 크기였다. 좁은 상마다 대추 밤 사과 감 등의 과일이 위아래로 포개 쌓였다. 전이며 약과, 유과 등 과자들도 비좁은 자리 한쪽에 꾹꾹 눌러 담겼다. 도저히 자리를 잡지 못한 제철 과일 수박은 상 앞에 놓였고, 대구포 대신 먹기 편한 오징어포가 상 오른편을 차지했다.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등 4대 조상의 기일 제사를 8월 15일에 함께 지내는 임청각 종가의 제사상 모습이다. 경북 안동의 500년 종갓집 제사상 풍경을 연상하면 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모습이 떠오르지만 임청각 종가는 우리의 편견을 단번에 깨준다.

추석을 앞두고 6일 기자와 만난 이 씨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거실에서는 으리으리한 제사상을 펼 수 있는 공간도 없다”며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고조부인 ‘석주 이상룡’을 기리는 오페라가 서울에서 열려 가족들과 다 함께 공연을 즐기는 것으로 제사를 마무리했다”고 말했다. 이 씨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의 현손(玄孫·증손자의 아들)이다.

임청각 가문은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로 평가된다. 이 집안은 석주와 그의 동생, 아들, 손자, 손자며느리 등 총 11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구한말에는 전국에서 가장 큰 99칸짜리 사대부 반가(班家)였고, 안동에서 500년을 이어 온 유림 명문가였다.

이 씨는 “석주 선생께서는 일제에 나라를 뺏긴 이듬해인 1911년 ‘공자와 맹자는 시렁(선반) 위에 올려놓고, 독립 후에 다시 찾겠다’는 말을 남긴 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떠났다”며 “가산을 전부 투입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셨고, 또 군자금을 대느라 제대로 된 제사상을 올릴 수 없던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제사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례허식을 전혀 찾을 수 없다. 2011년부터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전은 사서 올리고, 나물은 여동생들이 직접 해온다. 먹기 힘든 대구포 대신 오징어포를 올려 제사가 끝나면 곧바로 구워먹는다. 이 씨는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생전에 ‘시누이 노릇 할 거면 다시는 친정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셔서 지금도 여동생들이 제삿날 설거지까지 도와준다”고 말했다.

임청각 종가 역시 4대 조상의 기일 제사를 모셔야 하는 유림의 전통을 지키고 있지만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1년에 8번이나 되는 제사를 지내야 하는 종손에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94년 종가의 식구들은 1년에 가장 의미 있는 날에 제사를 모아 지내기로 획기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 씨는 제사상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집집마다 내려오는 ‘가가예문(家家禮文)’이라고 강조했다. 이 씨는 “외갓집은 영남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인 안동 권씨인데, 이곳에서는 홍동백서를 원칙으로 해 우리 집안의 조율이시와는 순서가 전혀 다르다”며 “어느 집안이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각자 집안의 내력과 상황에 맞는 정성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종갓집일수록 제사상은 단출하고, 조상을 기리는 마음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광산 김씨 유일재공파 종가의 김병문 씨(72)는 “제사상에 음식을 해서 올리는 경우가 없다”고 말했다. 음식 종류 역시 과일과 떡, 꼬치 등 5가지를 넘기지 않는다. 김 씨는 “경기 성남시 분당에 사는 아들 부부가 4대 봉사를 지내는 기일 제사 때마다 꼬박꼬박 대구로 내려올 수 없어 아내와 둘이 먹을 수 있는 과일과 떡 위주로 올린다”며 “생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제사를 준비하는 모습은 조상님들도 원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종가의 제례문화를 연구해 온 김미영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은 “추석 차례상에서는 밥과 국을 송편으로 대신해도 되고, 조기나 탕, 포 등 번거로운 음식은 생략하더라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며 “과일 역시 제철에 나는 몇 가지만 준비하면 충분하다”고 조언했다.

유원모 onemore@donga.com·위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