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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피’로 종지부 찍은 20년 악연 [하태원 기자의 우아한]

입력 | 2019-09-14 09:39:00


  북한이 제일 혐오했던 존 볼턴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의 전격 경질은 북핵 외교가에 적지 않은 충격파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볼턴은 북한과의 핵협상에서 완전한 비핵화를 보장할 ‘최후의 보루’로 여겨졌던 상징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볼턴을 ‘트위터’로 내치면서 느닷없이 카다피를 소환했습니다. 40년 이상 리비아를 철권 통치해 온 독재자 였던 그는 2003년 핵 프로그램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 폐기를 전격적으로 발표한 뒤 관련 시설과 자료를 공개하고 핵 사찰을 허용했습니다. 이후 미국은 리비아와의 국교정상화에 합의했습니다. 리비아에 대한 경제제재가 해제된 것은 그 직후의 일입니다.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

이른바 ‘리비아 모델’이 완성된 것으로 미국에서는 불량국가 비핵화의 모범사례로 꼽고 있습니다. 하지만 카다피는 2011년 ‘자스민 혁명’으로 실각(失脚)한 뒤 시민군에 쫒기다 최후를 맞았습니다. 일각에서는 카다피의 최후를 ‘선(先) 핵폐기’와 연결 짓기도 합니다.

  자스민 혁명의 배후에는 미국을 포함한 서방세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생각이며 카다피가 최종병기인 핵을 손에 쥐고 있었다면 과연 미국이 정권전복을 꾀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논리에서 시작되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카다피의 최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대대적인 공습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북한이 이른바 리비아 모델에 극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리비아 모델의 가장 강력한 주창자는 바로 볼턴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트럼프의 볼턴 전격 경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9월 11일(현지 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볼턴은 김정은에게 리비아모델을 얘기하며 매우 큰 실수를 저질렀다. 카다피에게 일어난 일을 봐라. 볼턴 보좌관의 리비아모델 언급은 ‘큰 재앙’이었다. (북한에게 리비아 모델을 언급한 것은) 터프하기 보다는 현명하지 못한 것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1일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의 경질사유가 ‘리비아 모델’ 언급이라고 밝혔다. 사진출처 AP


지난해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첫 북-미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출처 노동신문

 

  연일 신형장사정포를 포함한 단거리탄도미사일을 쏘아 올리며 북-미 협상의 파국을 위협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들으면 흡족해 할 만한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볼턴의 나이(71세)를 생각할 때 20년간 이어져 온 악연도 사실상 종지부를 찍은 것 아니냐는 평가도 나옵니다.

  지난 2월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는 리비아 모델의 주창자였던 볼턴을 배제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 역시 북한을 달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미국 보수진영은 리비아 모델을 역사적으로 중요한 외교적 승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량국가와의 전쟁, 그리고 핵 비확산을 가장 주요한 국제정치적 외교적 사명으로 생각해 온 네오콘에게는 특히 그런 인식이 강했습니다. 그들에게 불량국가가 보유한 핵은 그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력의 사용도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네오콘적 사고가 지배했던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리비아 모델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준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1기 행정부(2001~2004년)에서는 국가안보보좌관을, 2기 내각(2005~2008년)에서는 국무부 장관을 지낸 콘돌리자 라이스는 자신의 회고록 ‘최고의 영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 해결은 불량국가라도 적절한 유인책을 제공하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증거를 제공했다. 독재자는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하나는 핵폭탄의 단추를 누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쪽에 팔 수 있다는 것을 리비아 모델이 증명했다.”

라이스 전 국무장관 회고록 ‘최고의 영예(No Higher Honour)’



  바로 이 논리가 부시 2기 행정부에서 북한과 협상에 나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논거를 제시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이 협상으로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 등이 도출됐지만 사찰과 검층과정에서 도출된 이견으로 협상은 좌초됐고, 6자 회담 역시 종말을 고했습니다.)

  트럼프가 제거한 것은 대북협상에서 ‘원칙’을 강조한 초강경파 참모 한 명 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북한을 가장 현실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그리고 북한핵을 가장 확실하게 제거해 한반도의 비핵화를 달성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옵션 중 하나를 스스로 없애버린 우를 범한 것 아니냐는 걱정이 생깁니다.

  문제는 이같은 결정이 미국이 그토록 자랑하는 외교안보 결정 시스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트럼프의 ‘즉흥적인’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김정은의 구미를 맞추기 위한 ‘비이성적인 결정’이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2021년 1월이면 마무리가 될 것인지, 아니면 그가 재선에 성공해 4년의 기간이 더 연장될지는 미국 유권자들의 손에 달려 있는 일입니다. 현재로서는 트럼프의 재선 확률이 더 커 보입니다.

하태원 채널A 뉴스제작팀 부장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