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대응용 슈퍼예산, 그 틈 노린 정략 배정 새는 돈 못 막으면 재정효과 반감 불 보듯
고기정 경제부장
지난달 27일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내년 예산안 브리핑에서 ‘하방’을 8번, ‘어려움’을 10번 언급했다. 경기가 급격히 꺼지는 하방 리스크가 커지고 있어 민생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는 진단이었다. 이 때문에 내년에 513조 원이라는 초(超)슈퍼예산 편성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이를 위해 적자국채 60조 원어치를 찍기로 했다. 올해 서울시 예산 35조 원의 두 배에 가까운 돈이다.
기획재정부는 나라 곳간의 문지기다. 외환위기 이후 20년간 ‘건전재정’ ‘균형재정’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번에 스스로 그 원칙을 폐기하려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부총리 발언에서도 그런 착잡함과 불편함이 읽혔다. 하기야 요즘엔 현 세대의 재정건전성 유지가 다음 세대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반론이 힘을 얻고 있다.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할 때 반드시 거치도록 한 예비타당성조사조차 이 정부 들어 이미 무력화됐다. 집권세력의 인식도 균형재정을 교과서적 강박관념으로 보는 쪽에 가깝다는 점에서 부총리가 기류를 잘 읽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민간의 활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만큼 재정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문제는 그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는 것이다. 지난주 청와대는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원이 추진한 문재인 대통령 개별기록관 설립이 대통령 뜻과 무관한 사안이라고 밝혔다. 개별기록관에는 부지 매입비 32억 원을 포함해 총 172억 원의 세금이 투입될 예정이었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관련 보고를 받고 대로했다며 조기에 선을 긋는 분위기지만 이 건은 행안부가 청와대 실무 비서진과 협의해 국무회의 의결까지 거쳤다. 예산 풍년을 틈타 대통령 심기 경호를 하려다 미수에 그친 정황이 엿보인다.
이 중에서도 최악은 정략적 재정 투입이다. 일본은 1990년대 버블 붕괴 후 공항 건설 등에 1000조 원 이상을 쏟아붓는 공공투자 확대에 나섰다. 경제가 공급과잉 상태임에도 구조조정 없는 단기 부양책에 집중하며 재정 확대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표를 의식한 각 정치세력과 정부의 결탁이 있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경제에 대한 오진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정치적 실패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 각 부처가 갑자기 늘어난 내년 예산을 놓고 행복한 고민 중이라고 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0’ 하나를 더 얹어서 청구했는데, 이제껏 보지 못한 규모의 예산이 배정됐다는 말도 들린다. 이런 때일수록 관료들이 알아서 선거용 사업을 진상하거나, 총선을 앞둔 정치권이 예산을 빼먹기 위해 코를 박고 싸워대는 ‘포크배럴’ 현상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국민이 눈 부릅뜨고 감시하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새 제2, 제3의 대통령기록관이 생겨난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