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HBO 5부작 ‘체르노빌’ 연출 요한 렌크 감독
HBO 5부작 미니시리즈 ‘체르노빌’은 원전 사고를 통해 국가적 재난뿐 아니라 개개인의 비극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치명적인 방사능에 노출된 원자로 지붕 위 흑연 조각을 군인들이 옮기는 장면도 실제 작업 영상을 참고해 ‘롱테이크’ 촬영과 컴퓨터그래픽(CG) 기술을 활용했다. ‘체르노빌’은 지난달 14일 스트리밍 사이트 ‘왓챠플레이’를 통해 국내에도 공개됐다. HBO 제공
‘체르노빌’을 연출한 스웨덴 출신 요한 렌크 감독은 “스칸디나비아인으로서 절망과 우울한 스토리에 본능적으로 끌렸다”고 말했다. 요한 렌크 제공
재난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파는 철저히 배제했다. 드라마지만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체르노빌’은 당시 사고를 담담하게 담아냈다. 22일 열리는 제71회 에미상 시상식에선 최우수 미니시리즈 작품상 등을 포함해 19개 부문 후보로 올랐다. 5월 방영 동시에 로튼토마토(신선도 95%), 메타크리틱(9.3점) 등 유명 영화리뷰 사이트의 호평도 이어졌다.
미국 드라마 ‘워킹데드’(2010년) ‘브레이킹 배드’(2009∼2010년) 등 상상 속 세계를 연출해 온 그도 이번만큼은 “진실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00일간의 촬영을 위해 방문했던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 일대는 “1980년대 소련을 재현할 완벽한 장소”였다. 1986년식 우크라이나 소방차를 찾는 데만 꼬박 4개월이 걸렸고, 낡은 모직 양복이나 스카프, 오래된 시계, 전화기 등을 구하기 위해 온라인 사이트 이베이나 우크라이나 키예프 벼룩시장을 헤맸다. 촬영도 체르노빌과 같은 기종으로 2009년 가동이 중단된 리투아니아의 이그날리나 원전에서 했다.
치밀한 묘사 덕분에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달됐다. 군인들이 원자로 위 흑연 잔해를 치우는 명장면도 시청자들의 ‘간접 체험’을 위해 철저히 계산한 결과다. 방사능 피폭 허용치를 고려해 1인당 주어진 90초 작업시간을 ‘롱테이크’로 담았고 스테디캠(대상을 따라가면서 계속 이어서 촬영하는 기법)을 활용해 긴박감을 살렸다.
“리허설만 3일이 걸렸어요. 개인적으로 롱테이크 촬영을 선호하진 않지만 그 장면은 그렇게 찍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실제 긴박하고 두려운 90초를 경험하길 원했거든요.”
끔찍한 사고가 주는 공포도 침묵이나 무미건조한 음악으로 극대화됐다. 이그날리나 원전에서 얻은 기계음, 금속음 같은 기괴한 소리를 효과음으로 활용했다. 렌크 감독은 “때로는 침묵이 몰입을 강화시킨다. 보이지 않는 방사능의 위협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극 중 폭발 사고를 은폐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소련 관료들의 모습처럼, 렌크 감독은 “유사한 비극은 진행 중”이라고 강조한다.
‘체르노빌’의 흥행으로 참사 현장을 찾는 ‘다크 투어리즘’도 크게 늘었지만, 그는 아직 체르노빌을 가보지 못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촬영 당시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대형 산불로 무산됐다. “그곳에 갈 날을 고대하고 있다”던 그는 소셜미디어에 게재된 관광객들의 외설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인증 사진들에 대해서는 “엄숙함과 존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인 연출을 보여준 그는 독특하게도 1993년 ‘스타카 보’라는 가수로 데뷔했다. 이후 마돈나, 비욘세, 데이비드 보위 등 유명 가수들의 뮤직비디오와 캘빈 클라인, 아르마니 등 브랜드 광고 연출로 경력을 쌓아왔다. 박찬욱 감독의 열렬한 팬이기도 한 그는 “세계 시장에서 한국 영화들이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제 친구인 작가 마이클 레슬리가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2019년) 각본을 박 감독과 함께 작업했는데 정말 질투가 나더라고요. 하하.”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