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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왜 현금을 쌓아두려 할까요

입력 | 2019-09-17 03:00:00

[가족과 함께 읽는 경제교실]




Q. 최근 기업들의 보유 현금이 많아졌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기업은 왜 현금을 보유하려 하며 기업이 보유한 현금이 부족하면 어떤 일이 생기나요?


A. 어린이날을 맞아 한 상점에서 5만 원짜리 지폐, 장난감, 도서상품권을 선착순으로 제공한다고 하면 어떤 게 가장 인기 있을까요? 분명 지폐, 도서상품권, 장난감 순일 것입니다. 같은 5만 원이라도 현금인 지폐는 도서상품권이나 장난감, 또는 다른 물건으로도 쉽게 교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서상품권은 현금보다는 못하지만 장난감을 살 수도 있고 약간의 수수료를 내면 현금화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장난감을 현금이나 도서상품권으로 교환하기는 힘들겠지요. 먼저 장난감을 살 사람을 찾아야 하고 가격도 5만 원보다 낮춰야 팔릴 겁니다. 이처럼 같은 가격의 물건이라도 현금으로 얼마나 쉽게 바꿀 수 있느냐를 나타내는 유동성의 정도에 따라 활용도가 다르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유동성이 가장 높은 자산은 당연히 현금입니다. 기업이 현금을 갖고 있으면 물건을 살 수도 있고 근로자에게 월급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계나 땅을 갖고는 곧바로 이러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현금 보유는 기업 입장에서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기업이 현금을 보유하는 이유는 거래적 동기와 예비적 동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학생들은 책과 학용품을 사고 점심을 먹고 교통비를 내는 등 일상생활을 하기 위해 돈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업은 매달 근로자에게 임금을 주고 원재료를 구매하는 등 일상적인 경영활동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합니다. 유동성이 낮은 기계, 건물, 땅 등을 현금으로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에 기업은 일상적인 거래에 사용하기 위해 현금을 보유하는데 이를 거래적 동기라고 합니다.

또한 사람들이 비상금을 모으듯 기업도 예기치 못한 일들에 대비해 현금을 보유하는데 이를 예비적 동기라고 합니다. 기업에 현금이 없으면 수익성이 높은 새로운 투자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현금이 없을 때 거래처가 갑자기 파산해 수익이 줄어들면 빚을 제때 갚지 못해 곤경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이 1997년 겪었던 외환위기는 기업이 현금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지 않을 때 어떤 위험에 처하게 되며 국가 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당시 기업들은 국내외 금융회사로부터 돈을 빌려 여러 사업에 문어발식 투자를 하며 몸집 불리기에 치중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태국 등 일부 동남아 국가에서 외국인 투자가들이 투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면서 그 충격이 아시아 전체로 확산됐고 한국도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러자 국내외 금융기관들은 기업에 대한 대출 연장이나 신규 대출을 기피했고 당장 돈을 갚지 못한 기업들의 파산이 속출해 많은 근로자는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당시 30대 대기업 중 17개가 순식간에 무너졌으며 기업 대출을 회수하지 못한 일부 은행도 문을 닫으면서 국가 경제 전체가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죠. 특히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대우그룹이 무너진 것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국내 기업들은 외환위기를 교훈으로 삼아 현금 보유를 줄곧 늘려왔습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한국 대기업들의 자산 대비 현금 보유 비중은 평균 30%로 외환위기 이전 6%에 비해서 큰 폭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한국에서만 나타난 건 아닙니다. 미국에서 현금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기업은 스마트폰 제조사 애플입니다. 현금 보유액은 2004년 55억 달러에서 2018년 2400억 달러로 44배가 됐습니다. 세계 12위 외환보유액을 가진 태국(2099억 달러)보다도 많습니다.

아울러 최근 미중 무역전쟁, 일본의 수출 규제, 국내 경기침체 등으로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기업들이 현금을 보유하려는 성향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예비적 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도한 현금 축적은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현금을 보유하기만 하고 투자하지 않는다면 돈을 잘 사용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소비자가 만족감이 가장 큰 수준에서 소비와 저축, 그리고 현금 보유량을 결정하듯이, 기업도 이익을 가장 크게 하는 수준에서 적정 투자 규모와 현금 보유 비중을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지은 한국은행 경제연구원 금융통화연구실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