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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인도적 지원 시대의 종말[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입력 | 2019-09-19 03:00:00


2007년 정부의 대북 지원 식량을 실은 트럭들이 줄을 지어 통일대교를 건너 북한으로 향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이웃집이 아무리 가난하고 불쌍해 보여도 돕고자 할 때 방법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자네 사정을 잘 아니 받아” 하며 무턱대고 돈 봉투를 내밀었다가 이웃의 자존심에 상처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최근까지 추진하던 대북 식량지원이 이런 예에 해당한다. 통일부는 16일 국회에서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한 대북 식량지원 준비를 잠정 중단한다”고 밝혔다. 사실 ‘잠정 중단’이란 말도 어불성설이나 마찬가지다. 상대가 받을 생각이 없는데, 주겠다는 쪽에서 일방적으로 잠정 중단이니 영구 중단이니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나는 정부가 대북 식량지원 계획을 처음 공개했던 5월부터 이를 반대했다. 북한의 식량난이 과장됐고, 북한이 손도 내밀지 않았고, 억지로 줘봐야 남북관계 개선의 레버리지 효과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북한의 자존심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결정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5월 데이비드 비즐리 WFP 사무총장을 만나는 등 대북 식량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자리에서 비즐리 사무총장은 “북한 주민의 배급량이 심각하게 적어 긴급 인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문 대통령은 적극적인 공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나는 비즐리 사무총장의 말에 전혀 공감할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고 싶었다. “1인당 배급량 300g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배급받는 사람이 전체 북한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파악됩니까. 10년 넘게 극심한 식량위기라는 북한의 쌀값이 떨어지는 이유는…. 시장 조사도 못 한 이 보고서는 신뢰할 수 있나요.”

아마도 비즐리 사무총장은 이 질문들에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과만 본다면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할수록 WFP는 더 많은 후원금을 모을 수 있다. 실제로 WFP는 우리 정부로부터 대북 식량지원사업 관리비용 명목으로 1177만 달러(약 140억 원)를 받아냈다. 대북 휴민트가 세계 최고인 우리가 북한의 식량 사정을 파악하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정부는 우리의 정보력 대신, 신뢰하기 어려운 WFP의 말을 선택했다. 결과는 창피할 정도로 참담했다. 우리의 식량지원 제안에 돌아온 것은 북한의 조롱과 욕설이었다.

우리는 이번 사례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지원하려면 받을 사람의 의사와 감정부터 파악해야 한다. 북한도 공짜 쌀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측은 굶어 죽어도 자존심이 먼저다. 북한과 친해지려면 그 자존심부터 헤아려야 한다.

나는 이번 대북 식량지원 실패가 20여 년 동안 한국을 지배해왔던 ‘인도적 대북지원’의 패러다임에 종말을 찍는 사건이 될 것이라고 본다. 지금까지 남쪽 사람들은 “우리는 잘사니 도와줘야 하고, 가난한 북한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북한이 못살긴 해도, 당연히 지원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상대가 달라졌다. 젊고 자신감에 찬 김정은은 집권 후 남쪽에 손을 내밀지 않았다.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완성한 자신감으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을 움직이며 장기적 생존을 위한 새판 짜기에 몰두하는 중이다. 쌀 5만 t으론 김정은을 움직이기엔 어림도 없는 상황인 데다 그가 “거지 취급하느냐”며 화를 낼 가능성이 오히려 더 크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좋은 봄이 다시 올 것이란 희망을 안고 있는 수백 개의 대북지원 단체들도 이제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쌀과 의약품, 생필품 등을 모금해 가면 북한이 환대하던 시절은 이제 옛날이야기로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지금 북한 사람들은 북-미 수교를 맺고 세계적 기업들을 유치해 농기계와 비료, 의약품, 생필품을 북에서 직접 생산하는 시대를 꿈꾸고 있다. 그 꿈이 무너지고 다시 ‘고난의 행군’ 시대로 돌아가 온 나라가 굶주림으로 쓰러지지 않는 한 남쪽의 지원 물자를 애타게 기대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우리의 대북 정책도 북한의 부푼 기대에 편승해야 한다. 제공자와 수혜자로 나뉘는 일방적인 지원의 시대를 벗어나 이제부터는 상생과 공동 번영을 말해야 한다. 핵을 폐기하면 어떻게 남북이 함께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을지를 같이 말하고, 응원하고, 한발 더 나아가 체감할 수 있게 보여줘야 한다. 지금은 안갯속에 가려진 미래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지금 북한이 남쪽에서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지원이라고 생각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