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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구장 주도로 조직적 만세시위… 농촌서도 저항의 불길

입력 | 2019-09-21 03:00:00

[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72화> 양주-포천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3월 1일 경기 양주 광적면 가납리 일대에서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100년 전 선조들이 독립을 염원하면서 당당하게 일제 경찰에 맞섰듯, 초등학생과 대학생, 노인 등 참가자 1500여 명이 거리를 행진하면서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불렀다. 양주시 제공

늦은 밤 경기 양주 백석면 연곡리에 많은 면민들이 모여들었다. 두 사내가 앞에 나섰다. 안종태(36세·당시 나이)와 안종규(30세) 형제였다. 안종태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해야만 살 수 있다”고 연설했다. 1919년 3월 27일 밤 시작된 백석면 시위는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형제는 주민 600여 명과 함께 10여 리 떨어진 오산리 대들벌로 나아간 뒤 백석면사무소까지 진출해 만세시위를 벌였다.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3·1운동사’에서는 이 만세운동을 두고 “연곡리 사람이 백석면 전체를 동원하여 성공적으로 만세시위를 한 것”이라며 높이 평가한다.

안종태는 경기도 토목측량기사로 근무하다 일제의 토지 수탈에 분개해 사직하고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터였다. 안종규 역시 농사를 지으면서 마을 구장(이장) 일을 보던 청년이었다. 도시 지역에서 일어나던 만세시위가 리 단위의 농촌에서 농민들이 참가하며 대중 투쟁으로 전개되던 때였다. 만세운동 초기인 3월 초·중순에는 주로 서울이나 도시를 중심으로 청년 학생들과 지식인층 중심의 투쟁이 이뤄졌지만 3월 하순부터는 농촌의 농민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해 나갔다(장석홍, ‘양주 근대사와 3·1운동’). 경기 양주와 포천의 만세시위는 그 같은 만세운동의 발전 양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 마을 구장이 이끈 만세운동


경기 지역의 3·1운동은 21개 부·군 모두에서 일어났다. 일제가 만든 ‘조선소요사건총계일람표’에 따르면 3·1운동이 일어난 618개 지역 중 경기도가 143개 지역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서울과 인접해 있어서 서울의 만세운동이 빠르게 알려졌던 게 경기도의 만세운동을 넓게 확산시키는 동력이 됐다.

양주는 3월 18일 마석우리에서 1000여 명의 주민들이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날 시위는 전국적으로 주목받을 만큼 큰 사건이었다. 그 전까지는 학생들의 주도로 소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하지만 이후 만세운동이 대형화하면서 공세적인 양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마석우리 시위에서 일본 헌병이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해 주민 4명이 현장에서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지자, 이후 양주 곳곳에서 벌어진 시위는 치밀한 준비에 따라 전개됐다.

3월 26일 이담면 동두천시장 시위를 앞두고 배재학당 학생 정원이가 중앙과의 연락을 맡고 주민 한원택과 박창배 등이 중심이 돼 선언서와 태극기를 준비하는 한편 각 마을의 동원 책임자를 정하는 등 상세하게 계획을 세운 게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마석우리에서의 일제의 잔혹한 탄압 만행을 보고 훨씬 조직적인 준비의 필요성을 느껴 이루어진 것이다(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실제로 양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들은 준비 단계에서 발각돼 사전에 실패한 경우가 없다. 그만큼 시위가 치밀하게 계획되고 추진됐음을 알 수 있다.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 따르면 지방의 시위운동은 일제강점하에서 지방사회를 두 개의 뚜렷한 진영으로 구별시키게 된다. 면장을 첨병으로 한 수직적인 일제 지방통치 구조가 하나이고, 구장을 중심으로 한 우리 민중의 수평적 공동체 진영이 나머지 하나다. 두 진영 사이에 대립 전선이 형성된 뒤 일제의 총칼에 의한 무단적 대응으로 평화적인 독립의사 표명이 압살되면서 지방 시위의 새로운 특징들이 생겨났다. 구장들이 나서서 주민들의 의사를 결집시켜 시위운동을 조직화한 것이다.

안종규가 주도한 백석면 시위가 이런 경우였다. 일제는 1914년 면제를 개편하면서 식민지행정 말단기구로서 면제를 확립했지만 리(里) 단위의 향촌 사회는 전통적인 면리제 질서를 중심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따라서 구장은 향촌사회의 실무를 관장하면서 마을의 여론을 조절했다. 이런 이유로 구장은 마을 주민의 동원과 연락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백석면 시위에서 구장 안종규가 그의 형 안종태와 함께 독립 달성의 굳건한 의지를 갖고 만세시위를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장석흥, ‘양주 근대사와 3·1운동’).

백석면에서 시위가 일어난 3월 28일 양주 광적면 가납리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가납리 시위는 양주군내 만세운동 중 가장 격렬하게 전개된 사건으로 꼽힌다. 가납리는 가래나무가 많아 ‘가래비’로도 불린다. 가래비어린이공원에 세워진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의 안내문에도 100년 전 뜨거웠던 시위의 현장이 담담하게 묘사돼 있다.

가납리에선 3월 초부터 만세운동 소식이 전달됐고 만세시위를 호소하는 사발통문이 나도는 등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광적면 주민들은 3월 28일로 거사 날짜를 정하고 사발통문을 돌리면서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 이날 오후 가납리에 모여든 시위대원 950명이 만세를 불렀고 의정부에서 급파된 헌병들과 면장 이하용을 맞닥뜨렸다. 헌병이 해산을 명령하자 주민 이용화가 “뻔뻔스러운 도적놈들아. 남의 나라 국모를 죽이고 삼천리 국토를 강도질한 놈들이 적반하장으로 조국 독립을 하려고 부르는 만세를 부르지 말라, 가거라, 오거라, 건방진 소리야” 하면서 이들을 꾸짖는다. 면장 이하용이 슬그머니 뒤로 빠져 도망하자 시위대에선 “면장놈부터 타살하라”는 고함이 터졌고 군중이 몰려가면서 돌팔매를 시작했다. 이때 헌병대가 발포를 하면서 이용화 등 3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4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 “모두 가서 만세를 부르자!”

포천에서 만세의 함성이 처음 울린 것은 포천읍의 포천공립보통학교(현재 포천초등학교)에서였다. 1911년 개교해 포천 지방의 중요한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은 이곳에선 3월 13일 오전 11시 3, 4학년 학생들이 주도해 일본 교원의 눈을 피해 1, 2학년 학생들과 함께 학교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큰 소리로 외쳤다. 학생들만을 중심으로 이뤄져 대중적인 시위로 발전하지 못했지만, 이 지역에 팽배했던 항일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는 시도였다(김용달, ‘포천의 3·1운동’).

3월 24일 영평면에서 1000여 명의 시위대가 만세를 부르고 일제 헌병과 맞서면서 대중적 만세시위의 불이 댕겨졌다. 이어 닷새 뒤인 3월 29일 소흘면에서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다음 날 벌어진 대규모 연합 만세운동을 예고하는 전주곡”(‘포천의 3·1운동’)으로 평가받는 시위다. 이는 3월 30일 포천 지방에서 가장 크고 격렬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독립운동사―3·1운동사’에서는 이 장면을 생생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주목받은 시위자 중 한 명이 영중면 거사리의 농민 유중식(25세)이다. 그는 3월 29일 밤 “내일 신북면 사무소 앞에 군중이 모여 만세를 부르고자 하니 여러 사람과 같이 나오라”는 통문을 전달받는다. 이에 동리 사람들을 모아 놓고 “지금 통문이 돌고 있으니 30일에는 모두 신북면 면사무소로 가서 만세를 부르자”고 말한다. 그는 또 함병헌 등 동리 사람들에게 통문을 주면서 주변에 널리 알리도록 권한다.

다음 날 유중식이 함병헌과 함께 신북면 면사무소에 도착했을 때의 현장 상황은 만세운동의 열기로 가득 찼다. “…통문으로 소식을 듣고 몰려온 사람이 1000여 명이나 되었다. 그중 어느 학생 차림의 청년이 ‘여러분! 우리나라는 독립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이 우리를 원조하고 있소’ 하며 일장 연설을 하여 군중의 피를 끓게 했다. 뒤이어 누구인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여기에 호응하여 군중은 일시에 우렁차게 만세를 불렀다. 이와 같이 하여 유중식과 함병헌은 동리의 지도자로서 타면에까지 나아가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시위는 치열하게 전개됐다. 일제 헌병경찰들이 출동해 시위 주동자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해 시위자 3명이 죽고 다수가 부상을 당했다. 시위자들이 투석과 폭행으로 일제에 대항하면서 평화적 만세운동은 격렬한 폭력 시위로 바뀌었다. 김용달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3·1운동에서 의병 출신자가 추진한 만세 시위운동과 주요 의병 항쟁지에서 발생했던 만세시위 운동은 모두 하나같이 폭력 혁명적인 만세시위로 전개됐다”며 “뿌리 깊은 의병적 전통의 맥락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포천과 양주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만세운동이 무력투쟁으로 번진 포천 일대는 한말 의병부대의 주요 항쟁지였고, 양주 또한 지역 주민들의 동조와 호응 속에서 의병 항쟁이 마지막까지 전개됐던 곳이었다.

장석흥 국민대 교수는 양주의 3·1운동에 대해 “3·1운동 초기 과정에서는 중앙의 ‘민족대표’와 연결된 도시 중심의 종교 계통 인사들이 주도했는데, 양주의 만세운동에서는 중앙의 종교 조직과 연결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김용달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포천의 3·1운동 역시도 “학생과 교사, 직업적 종교인으로서의 목사 등 신지식층의 역할이 매우 미약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양주·포천=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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