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위선보다 文 임명 강행에 절망… 유체이탈 화법은 민심 이탈 불러 조국 사태서 비친 권력 사유화 함정… 인사권도 헌법정신과 民意 따라야 ‘문건 사건’ 경고 뭉갠 朴의 비극 보길
박제균 논설주간
자고나면 쏟아지는 조국 의혹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조국 법무부 장관은 언(言)과 행(行)이 유난히 따로 노는 특이한 성격인 데다 거짓은 거짓을 낳는 법이니까. 문재인 대통령의 장관 임명 강행도 내 예상대로였다. 장관 지명부터 임명까지 한 달 동안이나 나라가 어지러울 정도로 숱한 의혹과 비판 여론이 쏟아졌지만, 한번 정한 길로 가고야 마는 대통령의 불통 스타일을 아니까.
예상은 했지만 막상 임명 소식을 들으니 허탈하고 맥이 빠졌다. 한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조국의 장관 지명에 분노했던 많은 국민은 그런 사람을 기어코 임명한 대통령의 결정에 가슴 답답한 절망감을 느꼈다. 조국이 장관 후보자일 때는 아무리 의혹이 주렁주렁 달렸어도 개인적 일탈로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장관 자리에 앉는 나라에 살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한다는 건 다른 문제다. 그가 장관이 되는 순간, 조국 문제는 정치의 영역을 벗어나 상식과 도덕의 영역으로 번진 것이다.
이 지경까지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대통령은 윤석열 검찰이 조국 수사에 착수했을 때 지명을 철회했어야 했다. 검찰 수사가 ‘살아있는 권력’에 정면으로 칼을 들이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 대통령에게 지명 철회의 명분을 줘서 정치적 퇴로를 열어주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그쯤 되면 지명을 철회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상식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작금의 민심 이탈은 차고 넘치기 직전이다. ‘문 정권이 싫다’를 넘어서 한국이 싫다, 인간이 싫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이런 나라에 세금 내기는 더더욱 싫다는 소리도 들린다. 국민이 국가와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는 일종의 해리(解離) 현상이다. 대통령이 현 상황을 위중하게 보지 않고 넘기려 한다면 더 큰 노도(怒濤)에 직면할 수 있다.
무엇보다 문 대통령은 아주 위험한 함정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 임기 중반 한국 대통령들이 곧잘 빠졌던 함정, 바로 권력 사유화다. 임기 초 권력을 조심스럽게 다뤘던 대통령도 임기 중반에는 국민이 선거를 통해 위임한 권력을 내 물건인 양 착각하곤 한다. 전임 대통령이 그 함정에 빠졌다. 권력을 내 물건처럼 사인(私人)에게 나눠줬다가 국민의 신임을 배신한 것이다.
문 대통령이 민심의 도도한 물결을 거스르며 조국 임명을 강행한 데서 그 불길한 그림자가 비친다. 대통령의 인사권이란 것도 아무렇게나 행사해도 되는,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아니다. 인사권 행사도 헌법정신에 부합하고 민의(民意)를 존중해야 한다. 우리 헌법 전문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와 기회의 균등,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 완수를 규정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며, 남의 기회 빼앗기를 일삼고, 책임은 지지 않고 특권을 누린 사람을 법치의 보루인 장관 자리에 앉히는 것은 헌법정신에도 맞지 않는다.
더 위험한 전조(前兆)는 외교안보 정책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다. 한 나라의 외교 정책은 5년짜리 대통령이 멋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면허 운전자들을 중용해 역주행과 갈지자 운전을 한 결과는 참혹하다. 70년 안보의 둑인 한미동맹은 금이 쩍쩍 벌어져 위태롭기 짝이 없다. 윈윈 경제였던 한일관계도 무너졌다. 중국과는 과거의 조공(朝貢)관계로 회귀하는 느낌마저 준다. 북한에는 굴욕외교로 일관해 국민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더니, 어느새 국민들은 북의 인질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처지가 됐다.
전임 정권에서 권력 사유화의 징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은 이른바 정윤회 문건 사건 때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취임 3년 차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그때 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은 국민에게 위임받은 것임을 깨닫고 겸허하게 처신했다면 오늘날 그렇게 비극적 운명을 맞았을까. 문 대통령은 조국 사태가 뿜어내는 권력 사유화의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고 경계하며 부디 자중하길 바란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