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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문화가 튼실해야 바로 선다”… 40여년간 ‘인문학 강좌’ 500회 금자탑

입력 | 2019-09-24 03:00:00

노산 이은산 선생이 단골집 빌려 1977년 마산에서 인문학 강좌 시작
2013년엔 ‘합포문화강좌’로 개명… 시류에 영합 없이 시대정신 밝혀




19일 오후 합포문화동인회 제499회 강좌를 마친 뒤 강재현 이사장, 정창영 전 연세대총장, 조민규 고문(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부터)과 동인회 임원진 등이 기념촬영을 했다. 최충경 경남스틸 고문(둘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도 이 강좌 단골이다. 강정훈 기자 manman@donga.com

40여 년 전 ‘가고파의 고장’ 경남 마산에서 원로 시조시인이 다방을 빌려 오붓하게 시작했던 사랑방강좌가 어느덧 500회를 돌파했다. 외양과 내용을 통틀어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인문학 강좌로 우뚝 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77년 3월 17일 마산 출신 노산 이은상 선생(1903∼1982)은 당시 문인들의 단골집이던 마산 합포구 창동 희다방에서 ‘이 충무공의 구국정신’이란 강의를 열었다. 500회 금자탑의 시작이었다. 노산이 “경제가 풍요해져도 정신문화가 튼실하지 않으면 허망한 것”이라며 지역문인 20여 명을 모아 민족문화협회 마산지부라는 단체를 만든 직후였다. 협회는 ‘민족문화강좌’를 계속했고, 42회(2013년 5월)부터는 ‘합포문화강좌’로 부른다.

1983년 합포문화동인회로 이름을 바꾼 이 단체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회장, 이사장을 도맡았던 조민규 고문(84)의 헌신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40년 이상 고집스럽게 ‘정치성 배제와 운영의 독립성’을 지켰다. 정치권 인사와는 철저하게 거리를 두었다. 어렵더라도 회원 회비에만 기댔다. 조 고문은 23일 “중요하지만 외면당하는 시대정신을 찾으면서도 여론이나 시류에 편승하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유신시절과 군사정권에서도 지성의 칼날을 세우며 올곧은 맥을 이을 수 있었다.

노재봉 강영훈 정운찬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 시인 모윤숙 신달자, 소설가 정비석, 배우 윤석화, 소설가 이문열, 배우 최불암도 강사로 다녀갔다. 김옥길 김동길 송자 한완상 문용린 등 유명 교수, 김학준 전 동아일보 회장 등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강사들은 “이렇게 훌륭한 모임을 지방에서 수십 년간 계속한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라고 입을 모았다. ‘약소한 강사료’에도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는 이유다. 지난해 3월부터 이사장을 맡은 강재현 변호사(59)와 운영진은 마산역 플랫폼까지 나가 강사진을 맞는다. 마음과 정성을 담는 것이다.

이 단체는 청소년 대상 ‘영 리더스 강좌’, 야간학교인 ‘애솔배움터’도 운영 중이다.

합포문화동인회를 돌본 일꾼은 많지만 특히 최충경 경남스틸 고문(73)의 활약은 돋보인다. 최 고문은 몇 년 전 2억 원을 기부한 데 이어 2017년 창립 40주년엔 ‘합포 조민규 봉사상’을 만들고 1억 원을 더 냈다. 인문학 강좌를 통해 지역사회를 섬겨온 조 고문을 기리고 봉사와 헌신의 기풍을 확산시키기 위함이었다. 1회는 고 임중기 홍익재활원장, 2회는 대한적십자사봉사회 마산합포지구협의회가 수상했다. 상금은 1000만 원. 그의 큰아들인 최석우 경남스틸 대표(46)는 이번에 다시 1억 원을 기탁하며 아버지 뜻을 따른다.

26일 오후 7시 15분 경남은행 본점 지하 2층 대강당에서 개최되는 제500회 합포문화강좌의 강사는 이태수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75). 그는 ‘정의로운 사람, 정의로운 나라’를 얘기한다. 이에 앞서 19일엔 정창영 전 연세대 총장이 ‘민본경제’를 499회로 강의했다. 이날 동인회 관계자, 경남은행 임직원, 시민 등 200여 명이 석학의 얘기에 귀 기울였다. 예나 지금이나 강좌는 무료다.

합포문화강좌 500회 기념식과 제3회 합포 조민규 봉사상 시상식은 27일 오후 6시 창원 리베라컨벤션 7층 그랜드볼룸에서 열린다. 불교 봉사단체인 ‘금강자비회’가 수상한다. 11월 6일 오후 7시 반엔 마산 3·15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제35회 노산 가곡의 밤 행사가 마련된다.
 
강정훈 기자 manm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