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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노영민 비서실장이 잘 안 보인다[오늘과 내일/이승헌]

입력 | 2019-09-24 03:00:00

한일관계부터 조국까지 역할 미미… 文에게 사실 말하는 악역 자처해야




이승헌 정치부장

최근 대통령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화제인 책이 있다. 미국 언론인이자 다큐멘터리 작가인 크리스 위플이 쓴 ‘게이트키퍼(The Gatekeepers)’. 부제는 ‘How the White House Chiefs of Staff Define Every Presidency’다. ‘권력의 문지기’인 비서실장이 (자신이 모시는) 대통령과 그 정권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것이다. 바람직한 비서실장 역할을 알아보려 전직 비서실장 17명을 인터뷰했다. 미국 권력구조를 벤치마킹한 우리 정치에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필자는 이 중 3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첫째, 비서실장은 대통령에게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나쁜 놈’(SOB·son of a bit××)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를 비서실장으로 보좌한 제임스 베이커는 “비서실장은 (예스맨이 아니라) ‘노맨’(naysayer)이어야 한다. 그래서 워싱턴에서 가장 힘든 직업”이라고 했다.

둘째, 대통령과 의회 간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의 초대 비서실장인 람 이매뉴얼은 ‘오바마케어’를 통과시키려 한동안 점심 약속 대부분을 의원들과 잡았다. 아침 운동도 백악관이 아니라 의회 내 시설을 이용하며 스킨십을 넓혔다.

셋째, 비서실장(Chief of Staff)은 실장(Chief)보다는 비서(Staff)에 방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서실 조직을 장악하려 ‘사내 정치’에 매달리다 보면 대통령 보좌라는 본연의 업무에 소홀해진다는 이유에서다.

이 책을 소개받은 것은 정치권에서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나오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노 실장은 1월 임명될 때 ‘원조 친문’의 귀환이라며 대대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3선 국회의원에 주중 대사를 지낸 헤비급. 전임 임종석 실장보다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아니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결정, 한미동맹 균열, 조국 사태에 이르기까지 최근의 국정 난맥 도미노를 막기 위해 노 실장이 존재감을 발휘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국회에 나가 북한 핵실험 횟수를 잘못 말한 게 구설에 올랐다.

노 실장이 당초 기대에 못 미치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 책이 주목한 3가지와 무관치 않다고 생각한다. 우선 노 실장이 국정 현안을 놓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정치적 무게에 맞는 고언을 하고 있는가. 여권 인사들 대부분이 고개를 젓는다. 그렇다고 국회, 특히 야당과 활발하게 접촉하는가. 야당 중진들이 노 실장과 막걸리 한잔하며 세상 이야기 나눴다는 말 역시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그 대신 비서실 기강 잡고, 인사 접촉 시 보고체계를 강화했다는 말은 종종 들린다.

그런데 이게 100% 노 실장 잘못만은 아니라는 데 문제의 복잡성이 있다. 다시 ‘게이트키퍼’ 이야기. 제임스 베이커는 “비서실장이 자신 있게 일하려면 대통령으로부터 제대로 힘을 받아야 한다(empowered by president)”고 조언한다. 대통령의 성패에 비서실장이 영향을 미치듯, 실장 역할도 대통령이 규정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누군가의 비서 노릇은 고되다. 전임 임종석 실장은 1년 7개월 하면서 스트레스로 치아 6개가 빠져 임플란트를 했다. 문 대통령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좌하며 치아 10개가 빠졌다. 지금까지의 비서실장 ‘성적’만으로 정치인 노영민을 평가할 수도 없다. 하지만 조국 사태에 가려진 국내외 도전 과제가 파도 더미다. 노 실장이 이제라도 온몸을 던져 존재감을 되찾아야 하는 이유다. 필요하면 문 대통령과 담판이라도 해야 한다. 대통령비서실장이 제 기능을 못 하면 정권만 불행해지는 게 아니다. 국민도 피곤해진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