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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바지가 프랑스[임용한의 전쟁史]〈76〉

입력 | 2019-09-24 03:00:00


과거 군인들은 가능하면 화려함을 뽐내려 했다. 로마군은 번뜩이는 은빛 갑옷으로 무장해 빈약한 주변 민족을 겁줬다. 조선군은 한지의 두꺼움과 질김을 이용해 지갑(종이 갑옷)을 착용했다. 강철이나 가죽처럼 단단하지는 못했지만 도배지나 복사지처럼 얇거나 쉽게 찢어지지는 않았다.

총과 화약의 등장으로 갑옷이 사라지자 군대는 강함 대신 컬러를 택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유럽군은 군복에 원색을 도입했다. 영국군을 ‘레드 코트’라 부르듯 나라마다 상징색이 생겼다. 당시 기록에서는 나라 이름 대신 흰색, 푸른색, 붉은색, 회색의 군대라 불렀다.

원색의 군복을 입으면 소총병의 표적이 되지 않았을까. 18세기까지는 총의 위력이 떨어져 근접 사격을 해야 했고, 라인 배틀 시대의 병사들은 어차피 뻣뻣하게 서서 밀집대형을 이루고 전진했기에 원색이든 아니든 달라질 게 없었다.

총이 원색 군복을 도입시켰지만, 총이 원색 군복을 몰아냈다. 후장식(약실장전식) 소총의 등장으로 사거리가 길어지면서 저격병이 맹위를 떨쳤다. 20세기를 전후해 군대는 원색을 포기하고 눈에 덜 띄는 어둡고 칙칙한 색의 군복을 도입한다. 원색의 위험을 알고 빨리 바꾼 나라도 있지만, 색은 국가의 상징이라며 거부한 국가도 있었다. 전투에서 수천 명이 몰살하는 비극을 겪고서야 바꾸었지만.

그럼에도 일부는 이 조치를 맹비난했다. 프랑스가 붉은색 바지를 포기하자 “붉은 바지가 바로 프랑스다”라며 분노했다. 관념으로 포장한 과거에는 그랬을지 모르나 저격병과 기관총, 대포가 지배하는 전쟁에서 붉은 바지는 피 묻은 바지에 불과하다.

너무나 뻔하고 당연한 일인데 수천, 수만 명의 피를 묻혀야 오류가 수정된다. 인류는 뛰어난 두뇌, 지성과 상식을 지녔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인간을 우주로 보내고, 생명 창조까지 하게 됐어도 피바다가 되어야 붉은 바지를 갈아입는 어리석음은 좀체 개선이 되지 않는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