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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보수 진영의 집회는 재미가 없을까[사진기자의 ‘사談진談’]

입력 | 2019-09-25 03:00:00


터미네이터 오토바이를 탄 황교안 대표. 삭발식 사진에 수염을 그려 넣은 것이다. 사진 출처 구글

변영욱 사진부 차장

우리 사회에서 집회를 가장 많이 접하는 직업군이 사진기자일 것이다. 민생 집회부터 정치인들 집회까지 그것도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참여해 왔다. 돌과 최루탄이 날아다니는 전쟁 같은 집회도 있었고 축제 같은 시위도 경험했다. 현장을 가지 않아도 정보를 취득할 수 있는 취재기자와 달리 사진기자들은 현장을 꼭 가봐야 한다. 그러다 보니 집회 수준을 점수로 매길 만큼 감별 능력이 생긴다.

이른바 보수 진영의 집회 현장을 다녀온 사진기자들은 대체로 낮은 평가를 한다. 진행 방식, 무대 준비, 배경 음악과 구호 등이 재미없고 촬영할 게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삭발식은 사진기자들로서는 놀라운 이벤트였다. 삭발식은 약자들의 항의 방식이었기 때문에 여당과 진보 진영에서는 ‘쇼’ ‘코스프레’의 표현을 쓰며 비난했다. 현 정권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이벤트에 끌려 결집하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있는 것 같다.

어느 진영에 유리한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황 대표의 삭발 사진은 장엄한 이미지보다는 코믹한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다. ‘투 블록’ 헤어스타일에 수염까지 기른 채 터미네이터 오토바이를 모는 모습의 합성 사진이 대표적이다. 공안검사 출신의 딱딱한 이미지를 갖고 있던 황 대표는 순식간에 재미있는 정치인 대열에 살짝 발을 담그게 됐다.

디지털 기술은 비싼 비용 없이 정치 메시지가 공유될 수 있도록 했다. 정치인들에게 장벽은 이제 사라졌다. 올바르고 능력 있으면서 유권자들에게 다가갈 수 없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오히려 콘텐츠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않는 것이다. 한국당은 ‘언론 운동장’이 기울어져 여론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지상파 방송에까지 둥지를 튼 소위 진보의 스피커 방송인들을 보면 그런 주장에 일부 공감한다. 그렇더라도 이번 황 대표 삭발식에서 알 수 있듯이 재미없는 보수 야당도 재미있는 이벤트를 통해 구전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걸 느낀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기울어진 게 있다면 야당 내부의 역량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한국당의 전신이었던 정당들이 한국 정치사에서 보여줬던 실력과 실수들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황 대표의 삭발식 행사 당일 딸의 취업을 청탁했다는 의혹을 받아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의원의 모습이 보인 것도 놀라웠다. 반칙으로 자식을 대학에 보냈다는 의혹을 받는 장관 임명 반대를 위해 마련된 집회였는데 말이다.

두 번째 지적할 수 있는 역량은 시위를 조직하는 힘이다. 우리나라 보수 정당들은 대중 선동 운동을 할 필요도 없었고 그래서 축적된 경험 역량도 부족하다. 사회학자들은 민주화운동 같은 집합 열정과 연대가 발현되려면 먼저 운동 참여자들의 정서적 친밀성과 공감대 형성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노래, 구호, 박수, 만세삼창, 투석전 등의 퍼포먼스가 반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학자들이 주장하는 군중집회의 성공 요소가 우리 사회에서 축적되는 데 보수 야당의 참여와 학습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촛불집회, 삭발식, 토크콘서트 등은 왼쪽 세력들이 주로 활용하던 방식이었다. 형식만 본떠 준비 없이 나섰다간 이미지 생산과 유통 전문가인 반대 세력들의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다. 여성 당원 행사에서 ‘몸뻬’를 내리고 엉덩이춤을 추는 모습은 젠더 감수성이 없는 당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상징도 없고 프레임도 선점당한 보수 진영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논리와 비전으로 사람의 마음을 잡는 건 어떨까. 국민들은 이제 쇼를 볼 만큼 봤다. 국민들이 쇼에 일희일비하는 상황은 아니다. 이미지 정치로 미래가 안전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중도층도 많다. 상식과 사실을 우선시하는 국민들이 정치에 바라는 것은 취업률, 물가 등 국내 경기 관련 숫자의 개선과 국제사회의 격변으로부터 지켜지고 있다는 안정감이다.

모처럼 국민들의 시선을 끈 보수 야당. 정책에 대한 건강한 비판과 대안을 콘텐츠로 제공하면서 새로운 인물을 국민 앞에 내놓는 진짜 퍼포먼스를 보고 싶다. 모든 정치 세력이 쇼를 하면 소는 누가 키우나.

변영욱 사진부 차장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