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허당-코트 핏대, 두 모습 모두 허재”
정말 ‘어쩌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안방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예능 샛별’로 자리매김한 허재 전 남자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 ‘농구 대통령’으로 불리던 시절의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과 달리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농구공을 던져 보이고 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최근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서 특유의 넉살과 끼를 발산하며 ‘예능인’으로 변신한 허재 전 남자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54). 현역 시절 못지않은 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는 그를 23일 만났다. 그는 전날 긴 시간 야외 촬영으로 몸살 기운을 호소하며 식은땀까지 흘렸다. 방송을 시작하면서 채용한 매니저도 다른 스케줄 협의 때문에 자리를 비워 혼자 택시를 타고 힘겹게 약속 장소에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가 시작되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180도 달라진 생활과 방송 재미, 농구에 대한 애정을 털어놨다.
○ “서장훈이 대(大)고참이라면 나는 말단 직원”
“두 달 반 정도를 촬영장에서 보냈다. 이제 아내도 내 방송을 챙기고 둘째 아들 (허)훈이도 매니저 역할을 한다. 프로그램 모니터도 하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왜 이런 상황에서는 가만히 있냐’며 온갖 지적을 한다. (소속팀이 있어서) 연봉 받을 때는 마음이 편했는데…. 출연료 받으면서도 편하게 일하려고 한다.”
―각 방송사의 ‘러브콜’이 대단하다. ‘예능 대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후배 (서)장훈이도 챙겨야 하고 (현)주엽이 방송도 도와줘야 하고. 하여간 많은 인연 때문에 여기저기 나가고 있다. 대세라는데 예능에선 장훈이가 대(大)고참이고 난 말단 직원이지. 머리도 좋고 말도 잘하고 진행도 할 줄 알고…. 웃는 모습이 정해인(배우) 닮았다는 팬들도 있는데, ‘그거슨’ 아니지. 닮지는 않은 것 같고 웃을 때 귀엽게 봐주시는 것 같다.”
―감독 시절 다혈질적 모습과는 다른 표정, 우스꽝스러운 행동에 호감을 보내는 팬들이 많아졌다.
―현역 시절에는 다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방송에서 축구를 하면서 부상이 잦다.
“팬들이나 시청자들에게 미안한 부분이다. 은퇴하고 감독으로 지내면서 몸을 잘 만들어 놓을걸 하는 후회가 든다. 방송을 시작하면서 내 몸을 관리하고 돌아볼 시간을 벌었다. 방송 녹화 전날에는 무조건 술을 안 마신다.”
○ 중국 기자에게 ‘사이다’ 욕, 지금도 후회 안 해
허 전 감독의 인기에는 자연스럽게 내던진 어록도 한몫한다. 방송을 통해 한 ‘그거슨 아니지’는 전국구 유행어가 됐다. 프로농구 KCC 감독 시절의 ‘이게 블락이야’라는 호통과 대표팀 감독 시절 엉뚱한 질문을 한 중국 기자에게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라고 날린 ‘사이다’ 멘트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크게 화제가 되고 있다.
“기쁘다. ‘블락’은 정확하게 블로킹인데 급하니까 나도 모르게 나왔다. 어떤 팬들이 영상을 처음에 올렸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나도 재밌어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중국 기자에게 말한 건 지금도 후회는 안 한다. 경기 내용 관련 질문을 해야 되는데 ‘우리 선수들이 중국 국가가 나올 때 움직였다’는, 전혀 상황에 맞지 않은 질문을 해서 대답하기가 싫었다. 인터뷰를 더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 농구 인기 하락, 농구인 모두가 반성해야
예능 프로그램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농구 코트로 돌아가고픈 ‘뼛속까지’ 농구인이다. 한국 농구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주인공으로서 최근 프로 농구의 인기 하락, 국제 경쟁력 저하에 대한 걱정과 책임감도 분명 있다.
―한국 농구가 위기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잖다.
“농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깝다. 한 사람의 잘못은 아니고 농구인 모두가 반성해야 한다. 팬을 구름처럼 몰고 다니는 스타가 자꾸 등장해야 한다. 남자 농구만 봐도 10년 주기로 슈퍼스타가 나오고 그 중간 시기 공백을 메워주는 수준급 선수들이 배출되면서 경쟁력이 유지됐다. 신동파에서 이충희, 김현준, 그 다음 나로 왔고. 내가 죽을 만하니까 문경은, 이상민, 서장훈, 현주엽, 전희철 등이 나왔다. 이렇게 계속 ‘이어달리기’가 됐는데 지금은 아니다.”
―결국은 코트에서 뛰는 선수들의 목적의식이 중요한 게 아닌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경기에 들어갈 때 어떻게 플레이를 하겠다는 계산이 서야 하고 사전에 이미지트레이닝을 해야 한다. 지금 선수들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나에게 수비가 누가 붙을 것인지, 수비수가 이렇게 막으면 나는 어떻게 공격 전개를 하고 드리블과 슛 타이밍은 언제 가져갈 건지 계산을 하고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맞춤 연습을 반복해야 실전에서 빠른 상황 판단과 좋은 경기력이 나온다는 거다.”
―기본기의 중요성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
“예상 실전 상황을 이미지트레이닝으로 구상하면 기본적인 슛 훈련도 절대 제자리에 서서 할 수 없게 된다. (안)정환이한테 들으니 축구에서도 서서 슛을 하는 찬스는 전혀 안 난다고 하더라. 수없이 움직이다 숨이 차고 수비가 붙어 있을 때 자신의 본래 킥 실력이 나온다고 했다. 나도 예를 들어 밋 아웃, 팝 아웃 무브(패스를 받기 전에 스텝과 페이크 모션 등으로 수비수를 떨어뜨리는 동작)를 확실하게 해주고 다음 크로스 방향이나 L자 형태로 움직여 패스를 받고 바로 슛을 던지는 식의 연습을 수없이 했다. 한 지점에서만 하루 300∼400번 가까이 했다. 지겨울 정도로 했다. 40분 경기하면서 서서 자유롭게 슛을 던질 수 있는 오픈 찬스는 3번 이상 안 온다. 잘하는 선수는 더 기회가 없다. 그래서 움직이면서 패스를 받고 슛을 하는 반복된 연습이 중요하다.”
○ 허재의 불타는 승부욕 롤모델은 신선우
―동기부여가 된 선배들이 있었나.
“(이)충희 형이나 (김)현준이 형을 대표팀에서 유심히 보면서 슛을 던질 때 보폭, 스텝, 자세 등을 따라하고 익혔다. 팔 자세는 완전 오리지널 슛 폼이라 흉내 내기 어려웠다. 롤모델이라고 하면 신선우 선배(전 한국여자농구연맹 총재)다. 나랑 포지션은 달랐지만 아주 터프하고도 영리한 플레이를 했다. 승부욕도 강했고…, 그걸 배웠다.”
―‘내가 농구로 최고가 될 수 있겠구나’라는 감은 언제 왔나.
“용산고 1학년 올라가면서 웬만한 기본기를 다 내 것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대학에서 체력이 늘었고 나보다 슛이 좋은 선배들을 많이 보면서 중앙대 2학년 때 소위 농구 선수로 ‘세팅’이 끝났던 것 같다. 그때부터 어떤 경기든 겁나지 않았다. 서울 올림픽(1988년)에서 세계 최강급이라던 유고슬라비아하고 경기(92-104 패, 23득점 가로채기 7개)를 하는데 주눅이 안 들고 오히려 더 자신감이 생기더라. 내가 스크린을 활용해 오른손으로 원 드리블하고 슛을 하거나 드리블로 뚫는 동작에는 수비수가 잘 쫓아오지 못했다. 내 플레이에 확신이 있었다.”
어디 가서 농구 인생을 제쳐두고 예능 출연 얘기를 먼저 하는 것이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는 허 전 감독. 그가 자주 쓰는 말투대로 ‘하여간’ 방송이 됐든, 농구가 됐든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연 농구 아카데미 일로도 분주하다. 발달장애인 농구 교실부터 농구 재능기부, 유소년 유망주 발굴 등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밀려드는 스케줄과 업무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 것 같지만 인연이 닿는 사람들의 부탁은 절대 거절 못 하고 들어준다. 그런 바쁜 와중에도 28일 54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기자를 ‘의리파’ 형님은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이건 아니지, 소주 한잔하러 가야지.”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