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신화수, 의열단원 김상옥과 의기투합… 혁신단 만들고 기관지 발행 투쟁 한봉진도 군자금 모집하다 옥고
신화수, 한봉진 승려가 활동했던 고성군 옥천사 전경. 고성군 제공
1921년 5월 12일 일제 육군성은 이런 제목의 대외비 문서를 내각총리대신 앞으로 보냈다. 2년 전 일어났던 독립운동과 유사한 활동을 계획하던 조선인들을 체포했다는 보고였다. 이틀 뒤 동아일보는 ‘제2차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김두현 외 12명이 경남경찰부에 전부 잡혔다’고 보도했다. 일본군 보고서와 이 기사에는 모두 13명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여기에 경남 고성군 옥천사의 승려 한 명도 포함돼 있다.
신화수는 석방된 뒤 의열단원 김상옥 등과 함께 혁신단을 조직해 기관지 ‘혁신공보’를 발행하는 등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 와중에 1923년 또 한 차례 옥고를 치른다. 중국에서 국내로 잠입한 김상옥이 그해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뒤 은신하다 1월 22일 일제 경찰과 교전 끝에 자결한 사건에 연루됐기 때문이다. 신화수는 김상옥에게 군자금 1000원을 제공한 혐의를 받았다.
옥천사 승려 한봉진도 임시정부의 일을 돕다 옥고를 치렀다. 일제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1920년 임시정부가 국내에 파견한 고성군 출신 요원 윤영백과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인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고성=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