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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고 도전해야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죠”

입력 | 2019-09-30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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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로펌 ‘쉐퍼드멀린’ 한국사무소 대표 김병수 변호사




김병수 변호사는 5~6년 전부터 일주일에 한번씩 주말에 첼로를 배우고 있다. 그는 “꾸준히 실력을 쌓아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고 싶다”며 은퇴 후 꿈을 말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본사를 둔 ‘쉐퍼드멀린(SheppardMullin)’은 미국 주요 도시 외에 영국 런던, 벨기에 브뤼셀, 중국 상하이 등 해외에 진출해 있다. 현재 15개 지사에서 900명 가까운 변호사가 활동 중인 대형 로펌이다.        

“저희 로펌은 특히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화제에 많이 오르곤 했죠. ‘트랜스포머’ ‘트와일라잇’ ‘미션임파서블’ 시리즈 등 할리우드 영화들의 제작부터 배급,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법률자문을 제공해왔습니다. 물론, 공정거래, 특허, 금융, 바이오, 제약 등 폭넓은 전문 영역에서 인정받고 있고요.”

2004년부터 쉐퍼드멀린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병수(53) 변호사는 7년 전 한국 법률시장이 개방됐을 때 가장 먼저 서울 을지로에 한국사무소를 열었다. 2017년부터 그는 한국에 들어온 외국 로펌들로 구성된 외국법자문법률사무소협회(Foreign Law Firm Association) 제 2대 회장으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 외국어 실력 활용해 난민 등 소외계층 돕는 공익활동 시작

“변호사라고 하면 안 좋은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하잖아요? 분쟁에 나서고, 머리 아픈 일에 매달리고, 돈벌이를 좇는…(웃음).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변호사들이 소외계층의 소송을 대리하고, 장애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법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엔 한국 변호사 단체들도 적극적인 공익활동에 나서고 있죠.

저희 협회도 산하에 공익활동위원회를 두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습니다. 변호사로서의 직무 외에 외국어 능통성을 활용하는데 주력하려고 해요. 한국 공익변호사단체인 공익인권법 재단 공감과 함께 난민소송 교육 등을 했고, 난민 등 소외계층을 돕는 활동을 펴나가려고 합니다.”

김 변호사는 인터뷰 중에도 곧잘 활짝 웃음 짓는 부드럽고 여유 있는 표정을 보이지만, 그의 지난 이력을 살펴보면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주어진 환경에 머물지 않고 남다른 도전을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 미국에서 회계학 석사 딴 후 로스쿨 입학 등 남다른 도전

그의 어린 시절, 부모는 충남 논산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했다. 근처 외가 시골 논밭에서 뛰놀며 자랐던 그는 서울로 상경해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했다. 3년간 미국 유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기업 국제금융 부서에서 일한 후 텍사스 주립대에서 MPA(Master in Professional Accounting, 회계학 석사학위)를 땄다.

“국제 조세를 공부했는데, 판례가 아주 중요했습니다. 많은 판례를 찾아보다가 미국 법체계에도 관심을 갖게 됐죠. 국제금융이나 상거래에 미국 법이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요. 법에 대해 배우고 싶어 로스쿨에 진학했습니다.”

MPA를 마친 후 미국 회계법인들에서 채용 연락이 왔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로스쿨 진학을 준비하며 1년간 한국에서 컨설팅 회사에 다닌 후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라 조지워싱턴 로스쿨에 다녔다.

“미국 로스쿨은 방학 때 인턴 근무가 취업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 일리노이에 있는 로펌 로스 앤 하디즈(현 맥과이어 우드스 시카고 사무소)에서 인턴으로 2학년 여름방학을 보냈는데, 자료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일에 몰두했죠. 건너편 아파트에 살던 인턴 친구가 새벽에도 불을 켜고 일하는 제 모습을 봤다고 하더군요. 마침내 그 로펌 취업에 성공했죠.”            

- 변호사 생활 중 두 번의 고비 넘겨

김 변호사는 뉴욕에 있는 로펌 드웨인 모리스를 거쳐 캘리포니아에 있는 쉐퍼드멀린에 입사했다. 직장을 옮기다보니 3개주의 변호사 자격을 취득해야 했다.

“제가 미국에서 변호사 업무를 시작하게 된 1998년 한국에서 ‘IMF 사태’가 터졌어요. 그 때 한국 기업들의 해외자산매각 자문을 맡았습니다. 이후에도 한국 기업과 금융기관 관련 업무를 주로 해왔죠. 미국에 있을 때는 잦은 한국 출장이 쉽지 않아 좀 답답했는데, 한국에 사무소를 내니까 직접 얼굴을 보며 상담할 수 있어 좋습니다.”

늘 긍정적인 자세로 업무에 임하지만 그에게도 그만두고 싶었던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첫 고비는 변호사 3년차일 때 찾아왔다. 과중한 일에 시달리며 휴일에도 밀린 잠만 자는 생활을 지속하다보니 ‘무엇 때문에 일하는지’ 회의가 들었다.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없었던 거죠. 경력이 짧을 때는 주어진 일들을 처리하기에만 급급하니까요. 시간이 지나면서 하는 일의 의미를 알게 되더군요. ‘사람들의 문제 해결을 돕는 일’이라는 자긍심도 생겨나고요.”

두 번째 고비는 2009년에 닥쳤다. 건강에 이상 신호가 켜졌던 것.

“전에 고(故) 정주영 회장의 어록에서 ‘시련은 있으나 실패는 없다’라는 글귀를 보았어요. 두 번의 고비를 이런 각오로 지난 것 같습니다.”

요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지만, 그는 젊은 변호사들을 대상으로 미국 법 관련 강연을 하며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앞날을 걱정하는 청년들을 만나면 그는 늘 “기존 틀이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새로운 도전을 하라”는 말을 해준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게 무한한 선택 가능성이 있다는 거예요. 자신의 잠재력을 100% 활용해 장애물을 극복하면 좋겠습니다.”

그는 은퇴 후에도 하고 싶은 것들이 적잖다. 예전에는 미술관 큐레이터를 꿈꾸며 서양미술사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5∼6년 전부터는 일주일에 한번씩 주말에 첼로를 배우고 있다.

“첼로를 배우는 시간이 제게는 숨 가쁜 일상에서 놓여나는 ‘힐링 타임’이지요. 나중에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고 싶어요. 아직 실력이 멀었지만요(웃음).”


글/계수미 기자 soomee@donga.com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동아일보 골든걸 goldengir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