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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제도는 국가 인적자원의 문제다[동아광장/하준경]

입력 | 2019-09-30 03:00:00

‘공정한 입시’에 대한 견해 제각각… 독일-네덜란드 추첨제까지 운영 중
명문대 서열화 유독 심한 한국사회… “얼마 쓰느냐에 대학 갈린다”는 말도
경제력-지역 격차 보완할 대안 필요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공정한 입시제도에 대한 견해는 사람마다 다르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투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론’의 저자 존 롤스는 제도를 선택할 때 자신의 처지를 잠시 망각하게 하는 ‘무지(無知)의 장막’을 상정한 후 그 장막 뒤에서 생각해보자고 했다. 내가 부자인지 가난한지, 내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내 유전자가 어떤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제도를 만들면 편파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가장 공정하고 깔끔한 입시제도는 추첨제다. 지원자 모두 같은 확률을 적용받고, 가정환경의 영향이 배제되니 왈가왈부할 일이 없다. 네덜란드나 독일에선 지원자가 대학 정원보다 많으면 추첨제를 활용한다. 대학 공부를 원하면 동등한 기회를 줄 테니 적성을 찾아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대학생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학문에 대한 의지다.

대학이 서열화된 한국에선 추첨제를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명문대 합격증은 희소한 만큼 특별한 자격을 요구한다고 여겨진다. 그 자격은 뭘까? 운전면허의 자격은 운전을 안전하게 잘할 수 있느냐 여부다. 명문대생의 자격은 명문대에 주어진 자원과 어우러져 본인과 사회의 인적, 지적 역량을 극대화할 잠재력이 있느냐 여부다. 대학이 교육기관인 한, 앞으로의 가능성과 적성, 즉 잠재력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돼야 한다.

문제는 잠재력을 객관적으로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대기만성형의 사람은 정량지표로 뽑기 힘들다. 더 큰 문제는, 선별을 위해 경쟁규칙을 만들면 경쟁탈출(escape-competition) 행위, 즉 경쟁압력에서 벗어나려는 다양한 행태가 유발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족집게 사교육으로 경쟁자를 따돌리려는 행태를 유발한다. 고교 내신(학생부교과)은 경쟁이 덜한 곳으로 옮겨 갈 유인을 제공한다. 각종 비교과 요소(학생부종합)는 운용 방식에 따라 부모 개입을 심화시킬 수도 있고 교권을 강화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입시제도는 과정의 공정성뿐 아니라 그로 인해 유발되는 경쟁탈출 행위가 사회에 바람직한지도 종합적으로 고려해 설계해야 한다.

현행 입시제도는 사교육을 통한 경쟁탈출을 과하게 유발한다. 그 정도가 극에 달해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 매월 수백만 원을 쓰는 집들이 늘고 있다. 얼마 쓰느냐에 따라 합격확률이 바뀐다고 한다. 금력(金力)과 노력이 혼동되고, 없는 집 아이들의 기회가 그렇게 사라지는 일이 일상이 됐다. 서울 강남구 출신 고교생이 서울대에 입학할 확률은 열악한 구보다 10∼20배 높다. 이것이 잠재력 격차일까. 서울대 경제학부 김세직 류근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잠재력 격차는 그리 크지 않다. 즉, 명문대생 중엔 부모의 경제력이 없었더라면 입학할 수 없었을 학생들이 꽤 많다. 돈이 없어서 자격(잠재력)이 있음에도 배제된 이들도 그만큼 많다. 막대한 나랏돈이 투입되는 명문대에 소득 상위 20% 출신이 절반을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사실은 적극적 보정조치 없이는 체제 유지가 힘든 단계임을 뜻한다. 이것은 공정성 문제일 뿐 아니라 국가 인적자원 투자의 효율성 문제이기도 하다.

대학교육협의회 자료를 보면 고소득층 비중은 수능 전형의 경우가 학생부종합이나 학생부교과보다 높다. 미국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그래서 미국 수능인 SAT 주관기관에선 학생 형편이 어려운 정도, 즉 ‘역경점수’를 제공해 참고하게 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텍사스주립대는 어느 고교에서든 상위 10%에 들면 뽑아주는 일종의 지역균형선발제로 신입생의 80%를 채운다. 정운찬 전 총리는 서울대 총장 시절 서울대가 ‘강남구립대’가 돼 동질적 학생들로 획일화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 지역균형선발제를 도입했고, 그렇게 뽑은 학생들의 성과가 수능전형 입학생들보다 나았다고 한다. 많은 대학에서 비슷한 현상이 관찰된다. ‘학종’도 부모 개입을 막고 특정 고교 우대를 금지해 제대로 운용하면 기회격차 보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선 어떤 입시제도든 경쟁탈출 행위를 유발한다. 그래서 학교 및 전형별로 학생 출신 분포가 어떤지, 어떤 효과가 유발되는지 매년 정밀 분석해 공표하고, 사교육 효과가 커진 부분은 줄이면서 보정장치를 강화하게 해야 한다. 격차 보정이 더 이상 구색 맞추기에 그쳐선 안 된다.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