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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만 빈곤층의 ‘최후 안전망’… 수급대상 넓혀 ‘사각’ 없애야[인사이드&인사이트]

입력 | 2019-09-30 03:00:00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20년
연락 끊겨도 돈버는 가족 있다고 기초급여 못받는 빈곤층 89만명
부양의무자 폐지, 여론이 문제… 1인가구 생계급여 月51만원 불과
“겨우 먹고살 정도” 좌절감만… 저축 여력없어 빈곤층 탈출 막막
일각 “소득지원外 일자리 마련을”




위은지 정책사회부 기자

#1. “넉넉하지는 않지. 그래도 정부에서 이거라도 주니 얼마나 다행인지….”

서울 양천구에서 홀로 사는 A 씨(70)는 3년 전 기초생활수급자(수급자)로 선정됐다. 매달 손에 쥐는 돈은 주택 임차료를 제하고 50만 원 남짓. 많지는 않지만 허리가 아파 일하지 못하는 그에게는 생명줄 같다.

#2. “과일이나 빵, 그런 건 못 사 먹어요. 여유가 안 되니까. 만날 두부 콩나물 김치예요.”

중학생 자녀를 둔 수급자 B 씨(48·여)에게 수급비는 생명유지선이다. 굶어죽지 않을 수준의 생활비라는 의미다. B 씨는 “하루에 밥 한두 끼만 먹는데도 정말 힘들다”고 말했다.

7일로 제정 20년을 맞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1999년 제정돼 2000년 시행됐다. 이후 기초생활보장제는 A, B 씨 같은 빈곤층에게 최후의 사회안전망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까다로운 선정 기준, 상대적으로 낮은 수급비 등으로 빈곤층의 실질적 구제(救濟)에는 한계를 보인다는 지적도 있다.

○ 비(非)수급 빈곤층 89만 명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을 합쳐 한 달 수입이 50만 원에 못 미치는 C 씨(68)는 수급자 신청을 포기했다.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이었다. 부양의무자는 수급자를 부양할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부모나 배우자, 자녀 등이다. 수급자로 선정되려면 소득인정액이 기준 이하이면서 동시에 부양의무자가 부양능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C 씨에게는 자녀가 둘 있지만 연(緣)을 끊고 산 지 수십 년이다. 그러나 해당 주민센터는 “부양 능력을 판정하려면 자녀들 재산, 소득을 확인해야 하니 금융정보제공동의서를 직접 받아오라”고 했다. 부양의무자의 재산과 소득이 일정 기준 이상이면 부양의무자가 실제 수급자를 돌보든, 그렇지 않든 수급자격이 없다. 그래서 주민센터는 부양의무자의 재산과 소득 내용을 조회해야 한다.

C 씨는 자녀들을 겨우 찾아 어렵게 말을 꺼냈다. 돌아온 답은 “왜 우리가 ‘당신’을 위해 개인정보를 공개해야 하느냐”였다. C 씨는 “면목이 없었다. 차라리 급여를 포기하고 말지 싶었다”고 했다.

C 씨처럼 가난하지만 수급자가 되지 못한 비(非)수급 빈곤층은 지난해 기준 89만 명으로 추정된다. 최근 굶어죽은 채 발견돼 사회에 충격을 준 ‘봉천동 탈북 모자’도 비수급 빈곤층이었다. 모친(42)의 소득인정액은 ‘0원’. 수급자 신청을 했다면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부양의무자는 비수급 빈곤층을 만드는 걸림돌의 하나로 지목된다. 구인회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특히 노인은 자녀의 금융정보를 받아 와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수급자 신청을 하고 싶어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며 “부양의무자가 빈곤층 수급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겨우 먹고살 돈 받는다” 자조하기도

어렵게 수급자로 선정돼도 현재 보장 수준으로는 돈을 모으기 쉽지 않아 실질적인 ‘빈곤 탈출’은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 1인 가구와 2인 가구가 생계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준선은 각각 약 51만2000원, 89만7000원이다. 1인 가구인 수급자에게 월 30만 원의 소득이 있다면 정부가 21만 원을 지원해주는 식이다.

시민단체 ‘기초생활보장법바로세우기공동행동’이 지난해 2∼3월, 두 달간 B 씨를 비롯한 수급자 30가구의 가계부를 조사한 결과 이들은 매월 수입보다 평균 약 17만 원을 더 썼다. 이 30가구는 “저축을 할 수 없어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 간식을 마음 놓고 사본 적이 거의 없다” “먹고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털어놨다.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은 “기준 중위소득의 30%밖에 되지 않는 돈으로 한 달을 살아가라는 것은 잔혹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정부는 생계급여 수급자 중 근로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활근로사업에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자활근로사업으로 받는 돈은 최저임금의 70% 수준이다. 근로장려세제(EITC), 취업성공패키지처럼 근로능력이 있는 빈곤층의 취업 및 생계유지를 돕는 제도도 있다.

특히 EITC 예산은 1조 원대에서 이달 4조9000억 원으로 대폭 늘었다. 다만 노동시장에서 탈락한 이들이 금전 지원만으로 괜찮은 일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대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근로빈곤층 보호를 위해 정부가 전례 없는 선택을 했지만 소득 지원만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는 시각은 쉬운 접근일 수 있다”며 “빈곤층이 일할 수 있는 능력과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춰줘야 하며 현재 노동시장 상황이 어려운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 2015년 단계별 급여 지급, 수급자 급증


한계는 있지만 20년간 한국 사회에 축적된 기초생활보장제의 의미는 크다. 이 제도의 전신인 생활보호제도는 청소년이나 노인같이 생활능력이 없는 사람에 한해 국가가 도움을 제공했다. 기초생활보장제 도입으로 근로능력이 있더라도 생활이 어렵다면 국가가 급여를 지급했다. 빈곤층의 소득 보장을 시혜성(施惠性) 복지가 아니라 헌법이 규정하는 사회권으로 보장한 것이다.

기초생활보장제 도입 이후 가장 큰 변화는 2015년 시작된 맞춤형 개별급여 방식이다. 맞춤형 개별급여 도입 이전에는 소득과 재산이 보건복지부가 매년 고시하는 최저생계비 이하이면 수급자로 선정돼 생계 의료 주거 교육 등 급여를 한 번에 받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소득이 최저생계비를 조금이라도 넘는 순간 모든 급여를 못 받게 되는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 문제였다.

정부는 2015년 7월부터 해당 급여별로 기준을 다르게 정하는 맞춤형 급여로 개편했다. 매년 중앙생활보장위원회가 심의, 의결하는 국민가구소득의 중위 값, 즉 기준중위소득을 기준으로 각 급여기준이 정해진다. 올해 생계급여는 가구 소득인정액이 기준중위소득 30% 이하, 의료급여는 40% 이하, 주거급여는 44% 이하, 교육급여는 50% 이하인 경우 받게 된다. 예를 들어 가구 소득인정액이 기준중위소득의 35%라면 생계급여는 받지 못하지만 나머지 급여는 받을 수 있다.

맞춤형 급여가 도입되면서 수급자 수도 늘었다. 기초생활보장제 시행 1년째인 2001년 수급자는 141만9995명이었다. 이후 130만∼150만 명대에 머물다 2015년 수급자가 160만 명을 넘어섰다. 지난해 174만 명, 올해 7월 기준 183만여 명으로 늘었다. 이에 따라 예산도 증가하고 있다. 생계 의료 주거 교육 등 주요 급여의 국비 예산은 2000년 2조2453억 원에서 지난해 10조 원을 돌파했다. 내년도 예산은 약 13조1000억 원이다.

○ 탈북 모자의 비극, 더 이상 없어야

빈곤층 누구나 충분한 생활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면 이상적이다. 그러나 한정된 재원으로는 비수급 빈곤층이 없도록 수급자 범위를 넓히는 일이 더 시급하다는 지적이 많다.

교육과 주거급여에는 적용하지 않는 등 부양의무자 기준은 완화되고 있다. 하지만 생활비의 핵심인 생계와 의료급여에 미치는 부양의무자 기준의 ‘폐해’는 정부와 현장 모두 공감한다. 부양의무자 기준 전면 폐지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이지만 지지부진하다. 구인회 교수는 “정부가 부양의무자 폐지를 밝혔지만 정부 임기의 반이 지났는데도 속도도 늦고 의지도 불분명하다”고 말했다.

올 5월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사회안전망개선위원회가 낸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안은 정부 측 위원들의 반대로 합의안이 아닌 권고안에 그쳤다. 손병돈 평택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전면 폐지가 부담스럽다면 생계급여 부양의무자 기준이라도 폐지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 경우에는 연 1조3000억 원의 추가 예산이 소요된다”고 말했다.

부양의무자 기준이 없어진다면 사회적 혼란을 부를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수십억 원대 자산가 자녀를 둔 노인이 기초수급자로 선정된다면 납득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다. 복지부 관계자는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는 방향은 맞지만 완전 폐지에 이르려면 사회구조와 국민정서의 변화를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안으로 고소득·고재산 부양의무자에게만 부양의무자 기준을 적용하는 독일형 모델이 거론된다. 자녀의 소득과 재산이 특정 액수를 넘으면 부양의무자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또 부양의무자 기준은 폐지하되 현재 부양의무자에 해당하는 1촌 이내 직계혈족이 일정 소득 이상을 올릴 경우 생계급여를 감액하는 구간을 설정하는 미국형 모델 등이 거론된다.

한국사회는 지난 수십 년간 중산층이 두꺼워지는 등 발전을 이뤄왔다. 다만 양극화 현상은 심해지고 있다. 경기가 좋지 않아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국민이 적지 않다. 더욱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비급여 빈곤층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들에게 ‘먹고사는 것’ 이상의 충분한 돈을 쥐여주지 못하더라도 당장 먹고살게는 해줘야 한다. 더 이상 탈북 모자의 비극은 없어야 한다.

위은지 정책사회부 기자 wiz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