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더욱 그러지 말아야지 느낀 건 최근 스무 살 여자에게 “언니 조금 안됐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재수 중인 내 동생인데 수능이 얼마 안 남아 괴로운 그녀는 온갖 콘텐츠를 탐독하며 불안한 마음을 달래곤 한다. 그날도 밤 12시 넘어 전화를 하더니 다짜고짜 “언니는 기술을 업데이트 안 해?”라고 다그쳤다. 명색이 영상 제작자면 컴퓨터그래픽(CG) 같은 것도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CG는 내 분야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갑자기 동생은 내가 불쌍하다고 했다. 큰 회사에 안 다니고 혼자 일하는 게 불쌍하다고. 아무래도 할리우드에 취업한 한국인 CG 전문가의 성공 인터뷰를 본 듯했다.
“그 사람도 이과생이었대. 어느 날 갑자기 CG가 하고 싶어서 영어도 못하는데 무작정 떠났나 봐. 그리고 ‘스타워즈’ 만드는 회사에서 연락이 왔대.” “그래? 대단한 분이시네! 하지만 언니는 괜찮아.” 하지만 그녀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아, 언니가 아까워서 하는 말이라고? 잠재력이 넘치는데 혼자 코딱지만 한 회사 하는 게 불쌍하다고? 날 그렇게 높이 평가해주다니 고마워.” 결국 이런 말까지 나왔다. “나를 뽑아주는 회사가 아무도 없어서 혼자 시작한 거거든? 그러니까 그만 말해. 지금도 좋다고. 네가 자유의 가치를 알기나 해? 눈 떴는데 어디 안 가도 되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아냐고! CG? 그런 거 안 배워도 돼! 나 디즈니 안 들어가도 된다니까?”
“동생에게 전해줘. 회사원의 로망은 ‘디지털 노마드’(유목민)라는 것을.” 읽고 있니 동생아? “근데 언니 라이프스타일이 거의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 주인공인데?” 가족에겐 불쌍한 존재인 내가 친구에게 이런 소릴 들으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드라마 주인공 캐리도 칼럼니스트였던 게 기억나 가슴이 뛰었다. 내가 미드 주인공과 같은 직업이라니. 이제 섹스만 하면 되겠군.
그날 밤, 섹스 대신 명상을 했지만 나는 내 삶이 좋다. 누군가가 나를 불쌍히 여기지만 않는다면.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