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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사라진 일본, 감시도 함께 사라졌다[광화문에서/박형준]

입력 | 2019-10-02 03:00:00

박형준 도쿄 특파원


15호 태풍 ‘파사이’가 도쿄와 지바를 강타했던 지난달 9일 새벽. 창문 너머 바람 소리가 너무도 강렬해 창문이 깨질까 봐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태풍은 특히 지바에 큰 생채기를 냈다. 약 1만8000가구의 집이 파손됐고, 64만1000가구는 정전에 시달렸다. 9월이라지만 3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였기에, 정전 가구는 무척 고생했을 것이다.

정전 사태 때 두 가지 점에 놀랐다. 보름이 지나도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다는 게 첫 번째다.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 7만9300여 가구, 2주 지난 시점에 600여 가구가 여전히 정전이었다. 쓰러진 전봇대와 송전탑이 많고, 피해 지역이 넓어도 보름 이상 복구가 안 된 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피해 지역 주민들이 이에 전혀 불만을 터뜨리지 않는다는 점에 또 놀랐다. 일본 언론은 초동대처가 늦었다며 연일 정부를 비판했지만, 정작 피해 주민들은 담담했다. 방송 인터뷰 때 정부에 분노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단체 행동도 전혀 없었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을 취재할 때가 떠올랐다. 사상 초유의 대재앙에 정부는 우왕좌왕했다. 헬기로 구호물품을 피해 지역 동사무소까지 보냈지만, 직원들도 모두 대피하는 바람에 물품이 전달되지 않았다. 보다 못해 도쿄, 니가타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이 차를 끌고 피해 지역으로 가서 즉석 주먹밥을 만들었다. 피해 주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때도 정부를 비난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국중호 요코하마시립대 교수는 저서 ‘흐름의 한국, 축적의 일본’(2018년)에서 ‘노예근성’이라는 다소 과격한 단어로 일본인의 특징을 설명했다. ‘타인의 힘에 의존해 구제받으려 하고, 스스로 자신을 구제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는 자신을 구제해줄 가장 강력한 존재인데, 어떻게 정부에 분노하겠는가. 그렇기에 일본인들은 촛불시위로 정권을 바꾼 한국에 대해 “정말 신기하다”고 말한다.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일본인의 기질과 문화를 존중하지만, 그로 인해 정부에 대한 감시가 소홀해질 수 있다는 점은 우려스럽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8월 말 아베 신조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일본이 옥수수를 수십억 달러 규모로 구매해 주기로 했다”고 말했을 때, 아베 총리는 “(정부 구매가 아니라) 민간 분야에서 (자발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 민간 기업들은 공적 영역(정부)의 말을 매우 잘 듣는다”며 밀어붙였다. 결국 일본 기업들은 정부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불필요한 옥수수라도 구입할 것 같다.

일본 언론들은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강화를 ‘역사 갈등으로 사실상 경제 보복을 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기자가 만난 일본 지식인들은 대부분 “문제 있는 조치”라고 지적했다. 아베 정권은 “내부적으로 수출 운용을 수정한 것”이라고 선전하지만 감시하는 눈으로 보면 정부 주장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론조사 결과는 일본 국민의 50∼70%가 수출 규제 강화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이 적인가’라는 외침이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만 메아리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