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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 “DNA 나왔다니 어쩔수 없다” 약도 그려가며 범행 자백

입력 | 2019-10-03 03:00:00

이춘재 “이런 날 올줄 알았다”… DNA 증거 내밀자 범행 자백
14건 살인外 성범죄 34건도 자백… 8년동안 두 달에 한 번꼴로 범행
유영철-김대두 이은 희대의 살인마
경찰, 자백 신빙성 검증위해 이춘재 상대로 법최면 조사 검토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 이춘재(56)는 경찰이 피해자의 속옷 등에서 나온 유전자(DNA) 분석 결과를 들이밀자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며 태도를 바꿔 범행을 자백한 것으로 2일 전해졌다. 이춘재는 화성 연쇄살인 사건 9건 외에도 5건의 추가 살인과 34건의 강간 및 강간미수 범행을 지도까지 그려 가며 수사팀에 설명했다고 한다. 경찰은 이춘재한테서 보다 구체적인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에게 법최면 기법을 적용하는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 이춘재(56)는 화성 사건 9건을 포함해 14건의 살인과 34건의 강간 및 강간미수 범행을 자백했다. 군대를 제대한 1986년 1월부터 처제 강간 살인 혐의로 검거된 1994년 1월 사이에 두 달에 한 번꼴로 범행한 셈이다. 현재까지 자백한 것만으로도 이춘재는 20명을 살해한 유영철(2014년)과 17명의 목숨을 빼앗은 김대두(1975년)에 이은 한국 최악의 살인마다. 하지만 경찰은 이춘재의 범행이 이것이 전부가 아닐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2017년 고준희 양(당시 5세) 암매장 살인 사건을 해결했던 법최면 전문가 박주호 경위(45)를 투입해 이춘재에게 직접 법최면 기법을 적용하는 방안까지 검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DNA 증거 제시하자 “할 수 없네요”

이춘재가 지난달 18일부터 이뤄진 대면 조사 초기엔 범행을 시인하지 않다가 지난주부터 태도를 바꿔 자백한 데엔 유전자(DNA) 증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사건을 수사하는 경기남부지방경찰청 ‘화성 사건 특별수사본부’에 따르면 이춘재는 범죄심리분석관(프로파일러)이 면담 도중 5, 7, 9번째 화성 사건에서 자신의 것과 일치하는 DNA가 확인된 사실을 제시하자 “DNA 증거가 나왔다니 할 수 없다”며 태도를 바꿨다고 한다. 이춘재는 이어서 “언젠가 이런 날이 와서 내가 한 일이 드러날 줄 알았다”는 취지의 말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춘재는 이후 화성 사건 10건 중 모방범 소행으로 확인된 8번째를 제외한 나머지 9건을 비롯해 추가 범행 내용을 진술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먼저 이춘재의 범행으로 의심되는 자료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춘재가 기억을 떠올리는 대로 진술하는 방식이었다.

이춘재는 프로파일러가 펜을 건네주며 “(범행 상황을) 그려볼 수 있겠느냐”고 요청하자 선뜻 받아들였다. 이후 경찰이 출력해간 진술조서 A4용지 뒷면에 일부 범행 장소의 약도를 그려가며 내용을 설명했다. 총 48건의 범행 중 살인 14건에 대해선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억해서 이야기한 반면 강간과 강간미수 범행 34건 중에는 시기나 장소, 피해자의 모습 중 일부만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춘재가 자백한 범행은 전부 그가 군대를 제대한 뒤 처제 살인 혐의로 붙잡힐 때까지 약 8년 사이에 경기 화성과 수원, 충북 청주 일대에서 벌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 중 화성 사건을 제외한 살인 사건은 화성 일대에서 3건, 청주에서 2건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화성 출신인 이춘재는 수원의 S공업고등학교를 나와 당시 화성군 태안읍의 본가에서 살다가 1993년 4월 청주로 이사했다.

경찰은 2번째(1986년 10월 20일)와 3번째(1986년 12월 12일) 화성 사건 사이에 화성에서 발생한 살인미수 사건의 피해자 A 씨(69·여)도 1일 방문 조사했다. A 씨는 당시 성폭행을 당한 뒤 일부러 소똥이 쌓인 곳에서 뒹굴어 범인을 쫓아냈다고 한다. A 씨는 2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이춘재가 벌인 살인 사건이 14건이나 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도 죽을 뻔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밥도 먹여선 안 되는 범죄자”라고 말했다.

○ 법최면으로 이춘재 기억 되살릴까


이춘재가 입을 연 뒤로 경찰은 자백한 범행이 실제로 이춘재의 소행인지 신빙성을 검증하는 한편 그의 여죄로 추정되는 다른 범행을 찾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지금은 이춘재가 임의로 진술하는 내용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추가 범행을 파악하고 있지만 그가 미처 기억해 내지 못했거나 일부러 숨기는 다른 범행이 있을 가능성 때문이다.

그러나 약 30년의 시간이 흘러 이춘재의 기억이 흐릿해진 점은 수사팀이 맞닥뜨린 새로운 난관이다. 수사팀이 이춘재의 범행 장소를 관할했던 경찰서 문서고를 뒤지고 있지만 수사 기록이 보존돼 있지 않은 사건이 태반이다. 이춘재의 것과 일치하는 DNA가 검출된 4, 5, 7, 9번째 화성 사건처럼 유류품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내려고 해도 증거물이 보존된 사건이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아예 새롭게 수사해야 하는 사건이 대부분이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경찰은 이춘재의 입에서 나오는 진술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교도소 내에서 그에게 직접 법최면 기법을 적용해 조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춘재가 뒤늦게 자백을 철회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수사팀은 이미 화성 사건의 공소시효가 2006년 4월로 완성(만료)된 상황에서 수감 중인 이춘재를 상대로 법최면 조사를 실시할 수 있는지 법무부에 확인을 요청할 방침이다.

법최면 조사가 이뤄진다면 전북지방경찰청 박주호 경위 등 2명의 베테랑 법최면 전문수사관이 투입될 예정이다. 국내 첫 최면치료 심리학 박사로 알려진 박 경위는 2017년 친아버지와 동거녀가 고준희 양을 학대해 숨지게 하고 암매장한 뒤 8개월이나 숨긴 사건을 맡아 해결한 인물이다. 폐쇄회로(CC)TV에 흔적이 없는 가운데 법최면 조사를 통해 한 주민이 고 양을 목격한 날짜를 특정하도록 이끌어 실종 시점을 확인해냈다. 2015년 전북 정읍시에서 있었던 여성 납치 사건 때도 피해자의 기억을 되살려 용의자를 가려내기도 했다. 이미 박 경위는 수사본부에 차출돼 피해자와 목격자를 상대로 법최면 조사를 하고 있다.

경찰은 입을 연 이춘재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안양교도소로 이감하려던 기존의 계획은 취소한 상태다. 수사팀은 이춘재의 심경 변화를 막기 위해 초기부터 가족의 접견도 차단해 왔다.

한성희 chef@donga.com·이경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