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지킬 박사와 하이드… 한국과 영국에서의 폴[카버의 한국 블로그]

입력 | 2019-10-04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올해부터 서울글로벌센터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영어로 진행하는 심리상담을 시작했다. 고민을 들어줄 본국의 가족과 친구를 떠나 한국까지 멀리 온 외국인들 중에는 적응하지 못하고 우울감에 빠진 이들이 적지 않다.

얼마 전 담당 상담사를 만나서 얘기를 나눴다. 특히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 중에 영어권 출신은 30% 정도밖에 안 되니 상담할 수 있는 언어들을 확대할 필요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치료를 하는 데 있어 한국말 실력이 좋아도 모국어로 상담을 받는 것이 더 효율적인지 아니면 한국어로 상담을 하는 것이 충분한지 궁금해졌다. 왜냐하면 어느 언어로 말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성격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언어의 실력과 문화에 익숙한 정도가 그 사람 언어의 민감성과 인지 왜곡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상담사와 이야기를 나누다 나 자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나 또한 한국어로 말할 때와 영어로 얘기할 때 조금의 성격 차이가 있는 듯하기도 하고, 어떤 일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내가 외국인이라서 그래’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는 흔히 혈액형에 따라 사람의 성격이 다르다고 믿는다. 내 경험으로는 혈액형보다는 같은 사람이 다른 언어로 얘기할 때 성격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사람이 다른 나라에 오래 살 때 그 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성격이 조금씩 달라진다고 본다. 물론 주로 나 자신에 대한 분석이라 표본의 크기는 작지만 더 설명하도록 하고자 한다.

지난주 연례행사처럼 영국 본가에 갔다. 한국에서 하는 쇼핑, 운전과 외식 같은 일상적인 활동들을 영국에서도 했는데 이 같은 행위를 하는 사람은 동일한 나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그 방식이 달랐다. 나는 A형인데도 한국말을 할 때 그리 소심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의 주장을 강하게 표현하는 편이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대표적인 소심한 A형 그대로 행동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주변의 친구 몇 명도 영어와 한국어를 사용할 때 어휘의 뉘앙스 이해 부족 탓인지 한국어로 말할 때 다소 직설적이고 거친 면이 없지 않다고 얘기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쇼핑을 할 때는 종업원들이 외국인을 보면 하는 행동이 대체적으로 두 가지로 나뉜다. 외국인을 보고 너무 놀라서 혹은 영어를 하지 않으려고 피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외국인이라서 더 친절하게 뭐가 필요한지 물어보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려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영국에서 나는 그저 평범한 손님일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서는 내가 손님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특권의식이 조금은 있는 것 같다. 영국에서는 별로 기대감이 없어서인지 ‘지킬 박사’ 폴이지만 한국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서비스를 받게 되면 ‘하이드’가 되는 폴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내가 개선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운전할 때 양보와 매너를 모르는 많은 운전자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차를 같이 탔던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다. 하이드 씨가 나타나 비슷하게 공격적으로 운전하고 행동한 것이다. 영국에선 비매너 운전자들이 아예 없진 않지만 그래도 거의 없는 편이라 그런 운전자들이 간혹 나타나도 대수롭지 않게 지킬 박사처럼 여길 수 있는 편이다.

외식을 할 때 한국 식당에서는 요구 사항이 있을 때 하이드 성향이 나타나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요청한다. 영국에서는 대체적으로 요리가 덜 익었거나 하는 큰 문제가 아니라면 소심한 지킬 박사인 내가 불편 사항을 따로 요청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만큼 극명하게 다른 인격체가 공존하지는 않지만 한국어와 영어로 말할 때의 폴은 분명 차이점이 있는 것 같다. 영국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폴은 다소 소심한 성격의 실제 A형이지만 한국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폴은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B형일 때가 많다. 이렇게 다양한 언어를 말할 때 공존하는 나의 모습들과 성격들 속에서 무엇이 진정한 나의 모습인지를 찾아내고, 이를 통해 최상의, 최선의 폴이라는 인격체를 형성하고 싶다.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