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0만 자의 활자들로 가득한 경기 파주시의 활판인쇄박물관. 박물관 측은 “이곳은 단순히 구경하는 장소가 아니라 스스로 원고를 고르고 인쇄를 하며 책과 글자의 친구가 되는 곳”이라고 밝혔다. 출판도시 활판인쇄박물관 제공
이곳에는 3500만 자의 활자와 자모(납을 부어 활자의 자면(字面)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글자를 새긴 판), 주조기가 있다. 우리나라의 마지막 활자제조 공장인 ‘제일활자’에서 옮겨온 것들이다. 대구의 봉진인쇄소에서 가동되던 활판인쇄기와 재단기, 충무로 인쇄골목에서 가져온 접지기와 무선제본기 등도 있다. 자신의 이름을 문선(활자를 골라 뽑는 일)해서 책 표지를 만들고 책 제본을 하는 체험 프로그램은 아이들뿐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이상기 연구원은 “요즘 아이들에게는 잉크를 묻혀 인쇄를 하는 일이 어디서도 해보기 어려운 새로운 체험이고 어른들에게는 추억이 소환되는 과정”이라면서 “활자는 사라져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글자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경험으로 활자를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관객들이 글자와 만나는 전시는 이렇듯 진화 중이다. 글자는 볼거리라기보다는 기록물이라는 인식이 강해 도서나 팸플릿 같은 전시의 증거품목으로만 사용됐던 게 사실이다. 그랬던 것이 최근 들어선 글자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전시회와 박물관이 늘면서 주목받고 있다.
김은재 국립한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평면인 한글을 어떻게 입체적으로 해석하고 어떤 조형을 창조해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전시에 담겼다”면서 “특히 마루, 의복, 그릇 등 한글의 조형미를 이용한 상품들을 통해 관객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제품들을 제작해 대중의 관심을 유도하면서 그 제품들 속에서 한글이라는 글자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한글디자인: 형태의 전환’전에 선보인 강주현 작가의 작품 ‘모아쓰기’.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글자를 감상의 대상으로 조명하는 최근의 경향과 관객들의 호응에 대해 김은재 학예연구사는 “디자인은 삶을 변화시키고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할 수 있다”면서 “글자는 그 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이 되고 사용자들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거대한 디자인 프로젝트가 된다”고 말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