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카슈끄지 피살 1년, ‘사막의 다보스 포럼’ 부활 예고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지난해 10월 24일 리야드에서 열린 ‘미래투자이니셔티브(FII)’에서 연설하고 있다. 2017년 시작된 이 행사는 ‘사막의 다보스 포럼’으로 불린다. 사우디 정부가 국영 석유사 아람코 상장을 준비하고 있어 올해 행사에는 미국 JP모건과 씨티그룹, 영국 HSBC 등 유명 금융사들의 참여가 줄을 잇고 있다. 리야드=AP 뉴시스
지난달 27일(현지 시간)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의 리츠칼턴 호텔에서 열린 ‘사우디 관광산업 소개 및 관련 투자 설명회’. 이곳에서 만난 한 정부 관계자는 기자가 한국인임을 알고 삼성전자가 이달 29∼31일에 열리는 제3회 FII에 참가하는지부터 물었다. “잘 모르겠다”고 답하자 그는 “이 부회장이 꼭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막의 다보스 포럼’으로 불리는 FII는 2017년부터 매년 10월 말 사우디 정부가 개최하는 대형 행사다. 사우디의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34)가 주도하고 있다. 첫 행사와 지난해 두 번째 행사 모두 서구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올해 FII는 지난해와 달리 성공으로 이끌겠다는 사우디 정부의 의지가 강하다. 사우디 정부가 기업공개(IPO) 계획을 밝힌 국영 정유사 아람코의 상장 작업에 참여하기 위해 미국 JP모건, 영국 HSBC, 러시아 국부펀드 등 각국 금융업체가 앞다퉈 몰려들고 있다.
○ “사막의 다보스포럼에 복귀한 월스트리트”
“월스트리트가 카슈끄지 살해 1년 만에 ‘사막의 다보스 포럼’으로 돌아왔다.”
워싱턴포스트(WP)는 올해 FII에 미 월가의 유명 금융회사 및 정·관계 고위 인사가 대거 참석할 것이라고 최근 보도했다. 카슈끄지 살해 배후에 사우디 정부와 무함마드 왕세자가 있음을 비난하기 위해 대대적인 참석 거부가 벌어졌던 지난해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라고 전했다.
불과 1년 만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크리스천 코츠 울릭슨 미 라이스대 베이커공공정책연구소 연구원은 “사우디는 여전히 세계 최대 원유 수출국이며 막대한 부를 지니고 있다. 많은 투자자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진단했다.
중동 전문가들은 이번 FII 핵심 의제로 아람코 IPO를 거론한다. 세계 최대 비상장회사인 아람코는 지난해 매출 3559억 달러(약 429조5713억 원), 순이익 1111억 달러(약 134조977억 원)를 자랑하는 초대형 우량 기업이다. 사우디 측은 아람코의 기업 가치를 2조 달러(약 2414조 원), 각국 금융업계 관계자들은 이보다는 5000억 달러(약 603조5000억 원)가 적은 1조5000억 달러(약 1810조5000억 원) 정도로 보고 있다.
사우디 정부는 지난해 정부 내 이견, 카슈끄지 살해 후폭풍 등으로 잠시 중단했던 아람코 상장 작업을 최근 개시했다. 지난달에는 무함마드 왕세자의 최측근 겸 사우디국부펀드(PIF)를 이끌어왔던 금융 전문가 야시르 루마이얀을 새 아람코 회장으로 임명했다. 루마이얀은 과거 세계 에너지 회사에 주로 투자하는 등 보수적 행보를 이어왔던 PIF의 체질 변화를 이끌어낸 인물이다. 그의 재임 기간에 PIF는 미 차량공유업체 우버, 전기차 업체 테슬라, 일본 소프트뱅크 등 해외 유명 정보기술(IT) 기업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현지에선 무함마드 왕세자가 칼리드 팔리흐 전 아람코 회장 체제에서 IPO 속도가 지지부진한 것에 불만을 품고 인사를 단행했다고 보고 있다.
카슈끄지 사태의 ‘후폭풍’이 완전히 지나간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리콘밸리의 유명 IT 기업들은 여전히 이 행사에 싸늘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올해에도 구글과 우버의 참석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알려졌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중·장기 경제사회 발전 전략인 ‘비전 2030’을 통해 IT, 신재생에너지, 인공지능(AI) 같은 첨단 과학기술 기반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강조해 왔다. 이를 감안하면 세계적 IT 기업의 FII 외면은 사우디로선 가장 뼈아픈 대목이다. 미 워싱턴의 싱크탱크 아랍걸프국가연구소의 로버트 모길니키 연구원은 “사우디가 경제개혁의 핵심을 IT 산업 발전에 놓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IT 대기업의 불참은 FII 행사 취지를 약화시킨다”고 지적했다.
카슈끄지는 사망 전 WP 중동 문제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WP 소유주 겸 세계 최고 부호인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창업주는 직원을 죽인 사우디에 극도의 반감을 보이고 있다. 그는 2일 카슈끄지 살해 1주년을 맞아 살해 장소인 터키 이스탄불을 찾았다. 사우디 총영사관 인근에서 열린 1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고인의 약혼녀 하티제 젠기즈도 위로했다. WP는 사우디와 함께 100조 원 규모의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를 조성하는 등 다양한 협력을 펼쳐온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회장도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참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손 회장은 지난해 FII 기간에 사우디에 머물렀지만 이 행사에는 불참했다.
사우디는 최근 한국 미국 독일 일본 등 49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온라인 관광비자 발급을 허가하는 관광개방 정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세계적 호텔·관광 및 엔터테인먼트 기업들 역시 사우디의 빈약한 관광 인프라 등을 이유로 FII 참가에 소극적이다.
사우디 측의 부적절한 장소 선정도 FII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키운다고 지적한다. 행사가 열리는 리츠칼턴 호텔(인근 킹압둘아지즈 국제콘퍼런스센터도 행사장임)은 무함마드 왕세자가 2017년 11월 사우디 정·재계 고위 인사 수십 명을 감금했던 장소다. 왕실 최고 부자인 알 왈리드 빈 탈랄 왕자(64) 등은 이 호텔에 무려 3개월간 억류됐다. 재산의 상당 부분을 사우디 정부에 헌납하고, 왕실에 충성 서약까지 한 뒤에야 풀려났다. 사우디 정부는 이들 인사가 부정부패에 연루됐기에 억류했다고 주장했다. 서구에서는 이를 “재산 강탈 및 정적(政敵) 제거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이후 중동에서 리츠칼턴 호텔의 이미지는 급속도로 추락했다. 일부 중동 국가에서는 자국에 초정하는 해외 인사들이 감옥을 연상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이들이 묵는 호텔에서 암묵적으로 리츠칼턴 호텔을 제외했을 정도다. 최근 사우디의 관광개방 정책 취재를 위해 리츠칼턴 호텔을 찾았던 외신 기자 중 상당수는 “FII가 리츠칼턴에서 열린다는 사실은 국가 이미지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반응했다.
한 외신 기자는 “리츠칼턴 호텔에서 FII가 열리면 누구나 2017년 11월의 고위 인사 감금 및 카슈끄지 사태를 떠올리지 않겠느냐”며 “FII의 핵심 목표가 사우디라는 나라와 무함마드 왕세자라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만드는 데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면 이곳을 행사장으로 정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꼬집었다.
리야드·카이로=이세형 특파원 turt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