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래, 車배터리가 좌우 시장 급성장 6년 후엔 182조원… 메모리 반도체보다 규모 커져 獨-佛 “우리 차엔 우리 배터리”… 세계1위 中처럼 국가적 육성 나서 日도 자국 車기업과 똘똘 뭉쳐… 실리콘밸리 앞세운 미국도 가세 국내 3사 설계-제조 강점 있지만 핵심기술 日에 뒤져 R&D 시급
유근형 기자
폭스바겐이 지난달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전기차전용 플랫폼 ‘MEB’를 공개하며 전기차 배터리를 자체 생산해 나가겠다는 방침을 재차 강조하자 배터리 업계에선 이 같은 반응이 쏟아졌다. 한중일 3국 업체들이 전 세계 출하량의 99%를 차지하는 현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 지각변동이 시작될 것이란 얘기다.
전기차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미래 자동차의 엔진 격인 전기차 배터리를 둘러싼 각국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유럽연합(EU)의 전통적인 자동차 강국들은 총리 대통령 등 최고지도자까지 나서 전폭적인 지원을 펴고 있다. 자유무역을 강조해온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배터리 분야만큼은 “지난 세대는 어쩔 수 없지만 3세대 전기차 배터리는 무조건 자국산을 써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 정부는 5월 전기차 배터리 공동 개발 및 투자를 선언하며 ‘탈(脫)아시아’를 선언했다.
○ 에너지 산업의 ‘게임 체인저’
“전기차 배터리는 신에너지 산업의 게임 체인저(game changer·시장 판도를 뒤바꿔 놓을 만한 혁신산업)입니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해 말 국내 배터리 3사 경영진을 만나 “전기차 배터리는 메모리반도체 시장을 넘어설 대표적인 고성장 신산업”이라며 이같이 강조했다. 실제로 전기차 배터리는 ‘제2의 반도체’로 불린다. 국내외 시장 전문기관들도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미래에셋대우증권에 따르면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규모는 지난해 15조1000억 원에서 올해 25조 원으로 1년 만에 약 60%가 성장하고, 2023년까진 95조8000억 원 수준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2018년부터 5년 동안 시장규모가 6배 이상으로 급성장한다는 얘기다.
이 같은 성장 전망이 오히려 보수적인 분석이라는 시각도 있다. 미래에셋대우증권의 경우 전기차 판매량을 지난해 205만 대(보급률 2.2%)에서 2025년 1602만 대(보급률 12.2%)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제한 뒤 배터리 시장 규모를 추산한 것이다. 하지만 파리기후협약 이후 선진국들이 친환경 정책을 강화하면서 유럽은 2025년 전기차가 전체 자동차의 25%를, 중국은 20%를 각각 차지할 것이란 관측도 우세하다. 2030년을 전후해 유럽,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의 전기차 비율이 40∼50%에 이를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한 대에 배터리 탑재량이 지금보다 대폭 늘어날 가능성도 있는데, 그럴 경우 배터리 시장의 성장성은 더 크다”고 설명했다.
전기차용 배터리가 선박, 열차, 건설장비, 전기트럭, 전기스쿠터, 전기버스, 전기자전거, 무선청소기 등 다양한 곳에 탑재되고 있는 것도 성장 가능성을 높이는 요소다. 실제로 유럽 국가들이 자국 항구에 드나드는 선박에 대한 매연규제에 나서면서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전기차 배터리의 선박 탑재 움직임이 현실화하고 있다. 최근 삼성중공업은 삼성SDI와 함께 개발한 선박용 리튬이온 배터리 시스템에 대해 노르웨이 선급인 DNV-GL로부터 형식 승인을 받기도 했다. 형식 승인은 선급이 제시한 안전·성능 기준을 만족하는지 검증하는 절차로 인증을 받아야 선박에 적용이 가능하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시장 확장가능성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 한중일 배터리 삼국지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은 표면적으로는 정부 주도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중국이 앞서가는 모양새다.
정부 보조금을 받기 위해선 자국 업체의 배터리를 탑재하도록 유인책을 쓴 것이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중국 정부는 세계 전기차 시장을 이끌고 있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배터리 관련 보조금 정책을 2020년부터 폐지할 예정이다. 하지만 자동차 생산량의 일정부분을 의무적으로 전기자동차 등 친환경차로 채워야 하는 의무 제도를 도입해 전기차와 생태계 조성에 힘을 싣고 있는 상태다.
일본 파나소닉은 최근 전기차 최강 테슬라와의 독점계약을 끊고, 일본 도요타와 배터리 합작사를 설립했다. 이 합작사는 도요타뿐 아니라 도요타가 지분을 보유하며 연대하고 있는 마쓰다, 다이하쓰, 스바루 등 다른 일본 완성차 제조사에 배터리를 공급할 전망이다. 일본 자동차 산업이 똘똘 뭉쳐 시장 공략에 나서겠다는 전략인 셈이다.
한국은 어떨까. LG화학, 삼성SDI, SK이노베이션 등 국내 배터리 3사는 ‘제조 공정 기술력’을 앞세워 일본과 중국에 맞서고 있다. 설계 및 제조에 강점을 가진 한국 제조업의 특성을 배터리 산업도 이어받은 셈이다.
중국, 유럽, 미국 등에 생산기지를 만드는 등 선제적 투자를 감행하며 해외 자동차 업체들과의 협력을 다져온 것이 강점으로 꼽힌다. 특히 BMW 벤츠 폭스바겐 르노 볼보 GM 등 국내 배터리 3사가 대규모로 수주한 완성차 업체들의 전기차가 시장에 출시되는 2, 3년 후 한국 업체들의 시장 점유율은 크게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로 국내에서 가장 먼저 전기차 배터리 사업에 뛰어든 LG화학은 전체 매출 중 배터리 비중이 2024년 50%에 육박할 전망이다. LG화학은 2025년까지 시장점유율 1위(약 19%)를 이룬다는 목표다. 삼성SDI는 소형 전지 1위를 앞세워 공격적인 전기차 배터리 시장 확대 전략을 펴고 있다. 최근에는 한 번 충전에 600km를 주행하는 배터리를 선보이며 기술력을 과시했다. 이 같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BMW 전기차(i3, i8)에 탑재되는 배터리의 대부분을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후발주자인 SK이노베이션은 그룹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업고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다. 2025년 ‘글로벌 톱3’ 프로젝트를 본격 가동한 상태다.
배터리 시장의 한중일 과점 체제는 독일, 미국 등 자동차 선진국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시장의 분석이다. 신생 기업이 시장에 진입하고 실질적인 입지를 확보하는 데 수조 단위의 투자는 물론 7∼10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향후 배터리 시장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업체들이 기술력으로 치고 나가 자본력으로 버텼던 반도체 시장과 비슷한 양상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며 “중국은 기술력에 거품이 있는 게 사실이고, 3세대로 넘어갈수록 한국과 일본의 싸움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다만 한국은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소재 기술력이 일본에 비해 부족하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특히 SK이노베이션이 앞서가고 있는 분리막 기술은 일본과 백중세지만, 음극재, 양극재, 전해질, 파우치 기술은 일본보다 약 1년 가까이 기술 격차가 나는 것으로 전해졌다. 울산과학기술원(UNIST) 조재필 교수(에너지화학공학)는 “일본 중국은 자국 배터리 소재업체들을 전략적으로 키우는데, 한국은 반대로 가고 있다”며 “배터리 소재 기업들에 전략적으로 연구개발(R&D) 자금을 집중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근형 기자 noe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