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반대하는 핵실험·ICBM 시험발사 실질적 대미 압박카드 되기 어려울 듯 대신 대남 도발 위험성 커질 수도
스웨덴 북미 핵실무협상 결렬이 미국에 대한 북한의 ‘갑질’로 이어지고 있다.
북한 실무협상 대표인 김명길 외무성 순회대사는 협상을 결렬시키고 평양으로 귀환하는 도중인 6일 “우리는 이번과 같은 역스러운(역겨운) 협상이 다시 진행되길 원치 않는다”고 내뱉은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이 북한과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국내정치적으로 협상을 이용하려는 의도만을 가졌다고 규정하면서 ‘역스럽다’고 경멸한 것이다. 김대사의 발언은 같은 날 북한 외무성의 성명에도 등장한 표현이다.
북한의 이같은 입장은 사실 지난 2월말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뒤부터 지속되어온 것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뒤 북한은 이용호 외무상, 최선희 당시 외무성 부상의 하노이 현장 및 평양 기자회견과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가진 김정은 위원장의 연설에서도 거듭 밝힌 바 있다.
최부상의 발언은 이번 실무협상 결렬 뒤 나온 북한의 반응에서도 똑같이 되풀이됐다.
김명길 순회대사는 협상 결렬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에서 “협상을 위한 협상을 하면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미국에는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미 국무부가 협상이 유용했다고 반박하자 북한 외무성은 재반박 성명을 냈다. 성명은 “미국은 이번 협상을 위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으며 저들의 국내 정치일정에 조미대화를 도용해보려는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려 하였다”면서 “미국이 조미관계를 개선하려는 정치적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직 저들의 당리당략을 위해 조미관계를 악용하려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등 최대한 강경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다.
북한 외무성 성명의 거친 표현은 스티븐 비건 미측 대표가 미국 국익을 위한 협상이 아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이익만을 위해 활동하고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나왔을 것이다. 협상 결렬 이후 미국내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다.
미국의 거듭된 촉구에도 꿈적않던 북한이 처음 실무협상에 나설 의향을 밝힌 것은 지난달 9일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의 성명을 통해서다. 이후 권정근 미국국장, 김명길 대사, 김계관 고문 등이 담화를 잇달아 내면서 미국측이 실무협상에 북한이 만족할 협상안을 들고 올 것을 촉구한 끝에 협상에 나선 것이다.
이처럼 어렵사리 마련된 실무협상이지만 북한이 하루만에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면서 미국에 있는대로 ‘갑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갑질’이라는 표현은 일방적일 수 있다. 북한은 원치 않았지만 미국이 애걸복걸하니 마지못해 실무협상에 응했는데 미국의 입장이 여전히 북한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인 것으로 판명나자 불쾌감을 표시하는 것을 ‘갑질’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북한이 이처럼 ‘갑질’을 하는 배경으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북미 협상에 상당한 약점을 드러내고 있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 점을 의식한 북한은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빌미로 10여 차례 각종 최신 미사일과 방사포 시험발사를 거듭하면서 핵실험과 ICBM 발사가 언제든 재개될 수 있음을 시사했고 실무협상 직전에는 미국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잠수함발사미사일(SLBM) 시험발사까지 하는 등 강수를 두었다.
또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미 하원이 탄핵조사를 시작하면서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상황을 최대한 활용해 미국으로부터 최대한의 양보를 얻어내려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북한의 이같은 대미 협상 자세는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국운을 건 전력투구를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양한 수준에서미국을 압박하는 담화, 성명에 더해 미사일 발사를 통한 군사적 압박과 중국 러시아와의 외교관계 강화, 국내적으로는 자력갱생을 통한 경제발전 추구 등 모든 국력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저자세를 보이며 간신히 협상을 이어가는 것으로 보이는 미국이 북한의 ‘갑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말그대로 ‘을’만의 입장은 아닐 것이다.
우선 미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하다는 대북 경제제재를 지속적으로 강화해 오고 있다. 북한이 뭐라든 미 재무부는 지속적으로 유엔 안보리 제재와 미국의 대북 제재를 위반하는 북한 회사, 인물, 단체는 물론 외국회사까지도 지속적으로 제재 대상으로 지정해오고 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뒤로는 팔목을 꺽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북한의 ‘갑질’은 ‘말의 성찬(盛饌)’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셈이다. 또 북한이 ‘갑질’을 하면서도 연말로 제시한 시한을 거듭 재확인하는 것도 미국의 팔목꺽기로 고통을 겪고 있음을 자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 북한이 이같은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 어떤 카드를 쓸 수 있을까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북한은 핵실험과 ICBM 시험발사 재개를 언급하고 있다. 김명길 대사는 회담 결렬 기자회견에서 핵실험·미사일 발사 유예가 연말까지 유효한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 “전적으로 미국의 입장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대사의 발언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나온 것이어서 핵실험과 ICBM 발사를 대미 카드로 사용할 것이라는 의도를 담고 한 발언은 아닌 것으로 해석된다.
또 핵실험과 ICBM 발사에 대해 미국 못지않게 중국이 반발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 때문에 실제 카드가 되기 어렵다는 측면도 있다.
하노이 회담 결렬 뒤 북한이 동창리 위성 발사장을 재건하는 움직임을 보이다가 중단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중국과 국경에서 가까운 함경북도 풍계리 핵실험장에서 핵실험을 재개하는 것도 중국의 정치적 반발 우려에 더해 방사능과 지진에 의한 실질적 피해 위험성 때문에 가능성이 더욱 낮다.
북한이 미국에 반격할 카드로 공식적으로 밝힌 입장은 김위원장이 올해 신년사에 밝힌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전부다. ‘새로운 길’이라는 포괄적 표현을 담고 있지만 그 길의 구체적 내용을 북한이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아직 없다. 그것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될 수도 있다”는 식으로 이중 부정에 가정법을 쓴 매우 완곡한 표현에 그친다.
이처럼 지금까지 모호하게 새로운 길을 갈 수도 있다는 식으로 완곡하게 표현해온 위협이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을지는 북한의 움직임을 근거로 예상하기가 아직은 어려운 상황이다.
김위원장은 지난 4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미국에 연말까지 시한을 제시하며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일종의 최후통첩을 했고 이는 이후 북한 외교당국자들 입에서 기회있을 때마다 되풀이 강조되고 있다.
이번에도 북한 외무성 성명은 “조미대화의 운명은 미국의 태도에 달려 있으며 그 시한부는 올해말까지이다”라는 말로 끝나고 있다.
이처럼 북한이 연말시한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미국보다 오히려 북한이 더 ‘새로운 길’을 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음을 방증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결국 실무협상을 결렬시키고 벌이는 북한의 ‘갑질’은 거친 언사 이상의 카드를 갖기 어려운 북한이 보이는 한계점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말 이상의 갑질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 남쪽을 향해 군사적 도발을 일으킬 위험성이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북한은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북한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보이는 우리 정부를 향해 비난 성명을 주기적으로 내고 있다. 일단은 미국에 대해 우리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북한 입장을 대변하라는 주문으로 읽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대남 도발의 명분쌓기가 될 우려도 있어 보인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