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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에게 배우고 훔쳐라[임용한의 전쟁史]

입력 | 2019-10-08 03:00:00


아테네를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그리스 특유의 둥근 언덕과 푸른 하늘이 맞닿아 있는 경사면을 보면 중장보병의 대형이 눈에 잡히는 듯했다. 최초의 군대, 최초의 전술과 무기는 ‘대지’다. 지형이 전술을 결정하는 전부는 아니지만 지형에 맞지 않는 전술과 무기를 장착할 수는 없다. 바위 언덕이 가득한 아테네 주변의 지형을 보면 그리스가 중장보병을 장기로 하고 기병이 취약했던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다 중북부 지방인 테살리아에 들어서면서 깜짝 놀랐다. 눈 아래 그림 같은 평원이 펼쳐진다. 지금까지 본 그리스의 들판은 평지라고 해도 바위 언덕 사이에 낀 좁은 들판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테살리아로 들어오면 진짜 평원이 펼쳐진다. 간간이 있는 구릉들도 말이 올라가기 힘든 언덕이 아니라 오히려 말을 운동시키고 목초지로 쓰기에 적합하다.

그리스 중북부는 남부와 달리 기병이 발달했다. 특히 테살리아 지방은 그리스 최강의 기병을 배출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기병의 천국, 전술가의 천국이라 불리는 지형들은 이처럼 평원과 목초지 언덕이 적당히 섞인 곳이 많다.

이 기병들은 아테네인들에게는 악몽이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 파르테논 신전의 벽을 장식했던 패널에는 중장보병이 켄타우로스와 싸우는 장면이 유난히 많다. 반인반마의 켄타우로스는 기병을 상징화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아테네인들에게 기병이 얼마나 악몽이었으면 저런 패널을 만들었을까 싶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기병을 저주하고 켄타우로스같이 불량한 아이콘으로 변형시키는 것보다 기병을 양성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물론 노력은 했으나 성공은 못 했고, 그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패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적을 저주하고 원망하기는 쉽다. 그것은 파르테논 신전의 패널처럼 승리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승리하려면 영악해져야 한다. 적에게서 배우고, 훔쳐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무수한 전쟁사에서 한결같은 승리의 비법이었다.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