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의 비석과 지석 탑본’ 특별전
태종대왕 헌릉 신도비 뒷면 탑본. 숙종 때인 1695년 제작한 것으로 상단 ‘태종헌릉지비(太宗獻陵之碑)’라는 제액(題額) 아래 공신 명단 등을 기록했다. 가로 약 1.5m, 세로 약 4m다(왼쪽 사진). 태조 이성계가 독서를 하던 곳에 정조가 1797년 글을 짓고 글씨를 써서 세운 독서당 구기(讀書堂 舊基)비 탑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은 8일부터 12월 21일까지 경기 성남시 연구원 장서각에서 조선 왕실문화의 정수 가운데 하나인 ‘조선왕실의 비석과 지석(誌石) 탑본’ 특별전을 개최한다. 전시품은 조선 광해군 대부터 대한제국 시기까지 약 300년 동안 제작된 왕실 탑본 556점 가운데 아름답고 중요한 45점을 고른 것이다. 봉모당(奉謨堂·1776년 정조가 설치한 규장각의 시설)에 봉안됐다가 연구원이 소장 중인 이들 탑본 실물이 대거 관객을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왕릉의 비석과 지석은 제작 당시 왕실 주도로 탑본을 만들어 보관했기에 탑본을 통해 원형을 알 수 있다. 왕릉을 만들 때는 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 비석을 세우고 망자의 생애를 기록한 지석을 땅에 묻는다. 지석은 발굴하지 않는 이상 볼 수 없고, 비석도 시간이 흐르면서 마모된다.
영조가 후궁의 묘비를 만들기 위해 손수 쓴 표격지(標格紙)도 볼 수 있다. 표격지는 묘비를 만들기 전 글씨를 한 자씩 네모 칸에 나란히 배치한 종이다. 비문의 주인공은 딸 둘과 장남 효장세자를 낳은 정빈 이씨다. 8세 때 궁에 들어온 동갑내기 ‘솔 메이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영조가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효종대왕 영릉(寧陵) 청화백자 지석 시제품. 조선 현종 때인 1673년 영릉을 옮기면서 시험 삼아 백자로 구운 3점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오늘날에는 실물을 자유로이 확인할 수 없는 북한 지역 조선 왕실 기적비(紀蹟碑) 탑본도 전시에 나온다. 기적비는 숙종 이후 왕실 중심의 역사를 강조하며 조선의 창업과 관련된 장소에 세운 것으로 대부분 황해도 개성이나 함경도 지역에 있다. 독서당(讀書堂) 구기(舊基)비 탑본은 태조 이성계가 책을 읽던 함흥 동쪽 귀주(歸州) 설봉산(雪峰山)의 초당 자리에 1797년 다시 세운 비석의 탑본이다. 글도 글씨도 정조의 것이다.
전통 최고급 장황의 진짜 모습도 알 수 있다. 장황은 서화에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 족자 병풍 두루마리 책첩 등의 형태로 꾸미는 것이다. 박용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장은 “장황에 사용된 비단, 비단 문양, 가로세로 비율 등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잃어버렸던 전통 장황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