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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돼지까지 모조리 도살처분… 재기 걱정에 잠 못드는 농가[논설위원 현장 칼럼]

입력 | 2019-10-09 03:00:00

돼지열병 3주… 피마르는 사육농
“사육기반 한꺼번에 무너졌는데 돼지값만 물어주면 되는줄 아나”
투자비 못 건진 채 폐업 걱정도… 감염 경로 아직 확실치 않지만
확진 13곳 중 상당수 임진강 수계… “北 발병했을때 공동대응 했어야”




7일 오전 경기 파주시의 한 농장 입구에 설치된 ‘방역 초소’에서 군과 시군 공무원, 방역 용역업체 직원 등 4명이 한 조가 돼 출입 차량 방역과 통제를 하고 있다(왼쪽 사진). 파주시 농업기술센터에 설치된 소독시설에서 화물차가 소독을 하고 있다. 농장을 드나들 때는 소독 확인증이 있어야 한다. 파주=김동주 기자 zoo@donga.com

파주·강화·김포=구자룡 논설위원

7일 오전 11시 경기 파주시 운정1동의 돼지 사육 S농장. 정문 앞 주변 도로가 온통 하얀 생석회로 덮여 멀리서도 돼지 사육 농장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입구에는 군부대에서 지원 나온 2명과 공무원 1명, 방역 용역업체 직원 1명 등 4명이 한 조로 하루 3교대 8시간씩 ‘방역 초소’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축사의 분뇨 악취도 심한 곳에서 눈 부위만 빼고 손과 발까지 밀봉하다시피 방역복을 입은 모습이 보기에도 불편하고 갑갑했지만 근무자들 얼굴에서는 ‘보이지 않는 적’을 막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지난달 17일 파주시 연다산동에서 국내 첫 아프리카돼지열병(ASF) 양성 판정이 나온 뒤 경기 파주 김포 연천, 인천 강화 등에서 3주 이상 계속되고 있는 비상 상황이다.

구제역으로 소와 돼지 등 우제류(발굽이 짝수인 동물) 340여만 마리가 무참히 도살 처분된 파동 이후 8년 만에 찾아온 대형 가축 전염병 ASF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경기 북부 방역 전선이 뚫릴지가 초미의 국민적 관심사다. 충남 보령에서 3일과 6일 잇따라 의심 사례가 신고됐으나 음성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강원 철원 인제, 경기 포천 등에서 주요 매개체인 멧돼지의 폐사체가 잇따라 발견돼 ASF의 확산 방지 비상은 진행형이다. 최근 찾아가 본 ASF 방역 전선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적과의 소리 없는 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 초유의 “지역 내 모든 돼지 처리”


인천 강화군 불은면의 한 마을 진입로변 논 가운데에 도살 처분 돼지가 섬유강화플라스틱(FRP) 재질의 통에 담겨 매몰돼 있다. 도로변에서도 가스통에서 흘러나온 부패한 냄새가 역하게 났다. 강화=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8일까지 ASF 확진 지역은 파주(5곳) 강화(5곳) 김포(2곳) 연천(1곳) 등 13곳. 4일 찾아간 강화군청 4층 비상대책상황실 현황판에는 ‘10.4 살처분 종료 선언’이라는 붉은 글씨가 눈에 띄었다. 군내 39개 농장의 4만3600여 마리에 대해 ‘선제적 도살 처분’을 마쳐 강화도에 살아있는 돼지는 한 마리도 없다는 뜻이다.

정부는 3일 파주와 김포에서 모든 돼지를 도살 처분하거나 수매하겠다고 발표했다. 수매한 돼지는 모두 도축할 계획이어서 파주와 김포도 모든 농장에서 돼지가 없어진다. 통상 감염 농장의 3km 이내 가축을 도살 처분하는 것과 달리 특정 지역 대상 가축을 모두 처리하기는 방역 사상 처음이다. 연천은 도살 처분 혹은 수매 대상 지역을 양성 판정 농가의 10km 이내로 잡았다.

이처럼 특단의 조치가 내려진 것은 ASF 발생 3주가 지났지만 뚜렷한 감염 경로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ASF 바이러스를 처음 신고한 파주의 농장은 멧돼지 침입 방지 울타리가 있어 사료를 먹기 위해 들어온 쥐나 사람과의 접촉이 원인일 수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감염 전파 경로가 종잡을 수 없다 보니 돼지와 농가의 피해도 커지는 형국이다.

○ 특단의 도살 처분에 걸맞은 ‘적절한 보상’이 과제

ASF는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전파돼 공기 감염보다는 속도가 느리지만 치료약과 백신이 없다. 급성인 경우 사망률이 100%에 가깝다. 이런 치명적인 전염병이 전국으로 확산되면 양돈 산업은 물론이고 사료 관련 업체나 삼겹살 돈가스 외식업계 등 전후방으로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ASF로 타격을 받은 후 회복하는 데 36년이 걸렸다고 한다. 방역은 0.001%만 뚫려도 모든 노력을 허사로 만들 수 있다.

양돈 농장주들은 평소 남의 농장에 발을 들이지 않을 만큼 철저한 방역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방역 비상조치’가 내려진 만큼 상응하는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재 도살 처분이나 수매를 하는 경우 시장 가격의 80%(양성 판정) 혹은 100%(음성 판정) 등으로 보상한다. 일부에서는 “돼지 값 물어주면 피해는 없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지만 이는 돼지 사육산업의 특성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피해는 돼지 값에 그치지 않는다. 구제역 당시 약 4만 마리, 이번에는 4600마리가량이 도살 처분된 강화군의 농장주 한모 씨(63)는 “돼지 농장은 많은 시설과 투자가 들어가는 장치 산업”이라며 “대량 도살 처분은 한순간에 사업 기반인 돼지가 없어지는 데다 새끼 돼지를 들여와 다시 키우려면 오랜 시간이 걸려 투자 경영 손실도 크다”고 말했다. 처음 ASF 신고를 한 농장주 채모 씨는 주변 토양까지 오염됐을 가능성이 있어 다시 돼지를 키우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투자비도 못 건지고 폐업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가축 전염병 창궐은 천재지변 못지않은 피해를 줄 수 있다. 파주시가 ‘방역 재난 특별지구’ 지정을 정부에 요청해 ‘방역 재난’에 걸맞은 보상이 이뤄지도록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힌 것처럼 사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것 같다.

○ “2주 이상 돼지 울음소리 환청” 도살 처분 현장의 비극

대규모 가축 감염 사건의 피해는 경제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파주시의 농장주 A 씨는 지난달 25일 자신의 농장에 90명가량이 투입돼 도살 처분하는 현장을 지켜보다 받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돼지를 가두는 펜스를 만들 대형 철판과 가스통, 굴착기, 매몰용 섬유강화플라스틱(FRP) 등을 갖춘 도살 처분 대원들이 들이닥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돼지를 몰아넣고 비닐을 덮은 뒤 이산화탄소 가스를 주입하자 모돈(母豚), 자돈(子豚) 가리지 않고 애지중지 키우던 돼지 수천 마리가 30, 40분 만에 질식사하는 것을 망연히 지켜봤다. A 씨는 시 보건소에 수면 및 불안장애를 호소해 약물 처방을 받으며 악몽 같은 도살 처분 현장을 잊으려 하지만 쉽지 않다.

시청 공무원 B 씨는 도살 처분이 이뤄지는 농장의 정문 초소에 근무했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돼지들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2주 이상 환청으로 들려 보건소에서 상담을 받았다. 경기도는 파주 연천 김포 등에서 도살 처분 트라우마로 인한 상담이 549건에 이른다고 밝혔다. 도살 처분에 참가한 연인원은 2450여 명에 이른다. 최근 5년간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AI) 등의 도살 처분에 투입된 공무원 중 4명이 과로 등으로 사망하고 5명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었다.

○ 남북 공조 실종으로 ‘임진강 수계 전파’ 위험에 무방비

이번에 ASF 양성 확진 판정을 받은 13곳 농장의 상당수는 비무장지대를 거쳐 흐르는 임진강 수계를 따라 퍼져 있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 바이러스가 유입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많다. 지난해 8월 중국 동북 지방에 이어 올해 5월 30일 북한에서 처음 발견된 뒤 3개월여 만에 임진강 주변에서 잇따라 발생했기 때문이다.

건국대 축산학과 정승헌 교수는 9월 7, 8일 한반도를 종단한 태풍 링링이 북한에 많은 비를 뿌린 것이 한 요인일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ASF가 창궐해 죽거나 도살한 돼지를 주민들이 잡아먹으면서 노천에 버리거나 깊게 묻지 않은 피와 내장 등에 묻은 바이러스가 빗물을 타고 임진강으로 흘러들었을 수 있다고 정 교수는 추론했다.

임진강을 매개로 한 ASF 전파 가능성은 임진강 수계 남북 공동 관리 실종에 대한 아쉬움으로 이어진다. 북한에서 ASF 사태가 터진 후 남북 간에 공동 조사나 대응을 위한 어떤 접촉도 없었다고 한다. 군사분계선 인근에라도 공동 방역 조치를 했다면 ASF가 넘어오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다. 남쪽 비무장지대에 대해서만 헬기로 방역을 하는 것은 반쪽 처방에 그칠 수 있다.

과거에는 임진강 상하류 물 관리 공조가 안 돼 물난리 피해도 있었다. 2009년 9월 6일 북한은 임진강 상류 황강댐의 수문을 사전 통보 없이 개방해 하류 수위가 평소 2m에서 4m로 높아져 야영객 6명이 목숨을 잃었다. ASF 월남(越南)이 이번 사태의 한 요인이라면 남북 공조 실종의 대가를 방역에서도 치르고 있는 셈이다.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이남에서 1700년대에 처음 나타난 ASF는 21세기 들어 갑자기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한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 3개 대륙 50여 개국에서 발생했다. 인류의 생활권 밖에 있던 바이러스들이 직접 혹은 가축 등을 통해 인류를 공격하고 변종이 나타나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그 처참한 전선(戰線)이 지금 경기 북부에 형성되어 있다. 힘겨운 ASF 바이러스 방역 전쟁에 보다 많은 관심과 지지가 필요하다.

파주·강화·김포=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