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 경찰이 철저히 감시하는 이집트, 민생고가 국민을 거리로 몰아 구심점과 대안 부재로 동력 상실… 이라크와 레바논도 민생고로 시위 중
경제난과 부정부패에 지친 중동 국가의 국민들이 거리로 나오고 있다. 지난달 20, 21일 밤 이집트 카이로 도심에서 ‘시시 대통령은 퇴진하라’ 등 반정부 구호를 외치고 있는 시위대(위쪽 사진). 이달 3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시위대가 방독면을 쓴 채 군경에 맞서고 있다. AP 뉴시스
이세형 카이로 특파원
“시위 때문이다. 2주 전(지난달 20, 21일)에 타흐리르 광장과 주변에서 6년 만에 수백 명 넘게 모인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으니… 정부에서 엄청 긴장했다.”
기자를 타흐리르 광장으로 태워 준 이집트인 우버 기사는 수차례 “지금 이집트는 나라 전체가 혼란스럽고, 긴장한 상태”라고 강조했다. 그는 “시위 다음 주말인 지난달 27, 28일에는 경찰이 아예 도심 쪽으로 차들이 이동하는 것을 막다시피 했다. 지하철도 도심 주요 역에 정차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도심에서 시위 취재를 하려면 “매우 조심하라”던 이집트인 지인의 충고가 떠올랐다.
“평소에도 경찰이 타흐리르 광장에서 사진 찍는 걸 막을 때가 있는 거 알지? 요즘 같은 시기에는 경찰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의심받을 수 있어. 여기는 한국이 아니야.”
○ 감시 사회에서 발생한 6년 만의 시위
2013년 집권 이래 반정부 시위와 비판 언론을 탄압해 비난을 받고 있는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 동아일보DB
시시 대통령의 핵심 정적인 무슬림형제단과 민주화 세력 등 반대파에 대한 ‘피의 숙청’도 시위를 펼치기 어렵게 만든 요인이다. 말 그대로 공포감 조성 효과가 크다. 국제인권단체들은 시시 대통령 취임 이후 이집트 법원이 무르시 지지자 1200여 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휴먼라이츠워치(HRW)와 이집트권리와자유위원회(ECRF) 등은 2017년 이집트 당국의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무분별한 체포와 고문 실태를 지적하는 보고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 문제는 민생고와 부패
이처럼 정치적으로 억압된 분위기에서 지난달 20일 늦은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수에즈 등 주요 도시에서 반정부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는 건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다. 시위대의 주된 구호도 ‘시시는 떠나라’였다. 이를 두고 이집트에선 “얼마나 서민들의 삶이 힘든지를 잘 보여줬다”는 말이 나온다. 민생고가 시위를 발생케 한 핵심 동력이라는 것.
실제로 국민 3명 중 1명이 하루 평균 1달러를 약간 웃도는 돈으로 생활하는 극빈층일 정도로 이집트 경제는 심각한 상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같은 아랍 산유국들과 달리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량도 적다. 제조업 기반도 약하다. 관광산업은 2011년 이후 완전히 침체됐다. 여기에 재정 위기까지 겹쳐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2016년부터 올해까지 총 120억 달러(약 14조3500억 원)의 구제금융을 받고 있다. 현지인들은 “희망이 없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대통령과 군부의 부정부패도 국민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다는 평가가 많다. 스페인에서 망명 중인 모하메드 알리의 폭로가 미친 파장이 컸다. 이집트군과 15년간 거래해 온 건설업자인 알리는 시시 대통령과 군부가 국가적 경제난에도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호화 주택을 짓고 있다며 비난하는 내용 등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 시위가 지속되기는 힘들어
민생고와 부패는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인 만큼 향후 시위 발생의 동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시위가 지속될 것에는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시시 대통령의 강경 대응이 주된 이유다. 이집트 정부는 지난달 20, 21일 발생한 시위 뒤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대규모 체포 작전을 펼치고 있다. 현지 시민단체들은 2000명 이상 체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과 통신 기능도 떨어뜨렸다. 정부에 비판적인 국민들이 SNS에 활발하게 의견을 올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BBC방송과 미들이스트아이(MEE) 같은 비판적인 언론의 인터넷 사이트도 차단됐다. 한 외교 소식통은 “며칠 전 열린 외교 행사 때 ‘인터넷 속도’가 각국 외교관의 주된 화제였다”고 전했다.
시위를 이끌고 있는 강력한 지도자나 단체가 없다는 것도 지속적인 동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무슬림형제단 등 반정부 단체도 아직은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현실 정치에 대한 비관도 크다. 또 다른 소식통은 “현실적으로 시시 대통령 정도로 안정적으로 나라를 이끌 사람을 찾는 건 어렵다는 여론도 상당하다”고 말했다.
○ 이라크와 레바논도 시위로 시끌
변수는 있다. 이라크와 레바논에서도 이집트처럼 경제난과 부정부패에 불만을 품은 국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최근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2011년 아랍의 봄 사태처럼 중동 전체에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는 상황이 조성될 수 있다는 뜻이다.
특히 이달 이라크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면서 1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슬람교 수니파 극단주의를 추종하는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을 거치며 경제 파탄에 이르자 불만을 가진 청년들이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당초 평화롭게 진행됐던 시위는 이라크 당국이 실탄 사격을 가하며 폭력적으로 변했다.
‘중동의 파리’로 불리는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도 지난달 말부터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국가 부채가 860억 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의 150%를 넘는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GDP 대비 부채비율이다. 레바논 파운드화의 가치도 계속 폭락해 최근 2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일각에선 역시 심각한 경제난 속에 대선을 치르고 있는 튀니지 등에서도 다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해 정국이 불안해질 수 있다고 전망한다.
CNN은 최근의 중동 상황을 두고 시위대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1992년 대선 슬로건처럼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를 외친다고 전했다. 민생고가 중동 국가 국민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이세형 카이로 특파원 turt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