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75화> 여주-이천
경기 여주에서는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경기도 내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늦게 일어났고 기간도 짧았지만 시위는 격렬하게 전개됐다. 3·1운동 100년을 맞아 여주 세종로에서 기념 공연을 펼치는 모습(왼쪽 사진)과 금사면 이포리의 만세시위를 기려 금사파출소 인근에 세워진 표석. 여주시청 제공·여주=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지리적으로 가까운 경기도에는 서울의 3·1운동이 빠르게 확산됐지만 여주와 이천 지역은 상대적으로 늦었다. 8일 만난 구본만 여주박물관장은 이에 대해 “경기도에서도 여주는 비교적 서울에서 멀리 떨어졌고 철도와 도로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데다 한강이 여주를 가로질러 접근성이 떨어진 탓”이라고 설명했다. 이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두 지역의 만세운동은 과감하고도 격렬하게 전개됐다.
○ “평정함은 무기력한 것이니”
4월 1일 금사면 이포리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졌을 때 모인 군중은 3000명에 달했다. 당시 조선주차군 사령관이 육군대신에게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기도 여주군 내 이포에 약 3천, 안성군 내 안서에 1천, 양성에 2천의 군중이 폭행하고 심지어 전주(電柱)를 불 질러 넘어뜨리고 주재소를 불 지르고 우편국과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공용서류나 기물을 파괴하는 등 흉포함이 극에 달하고….’(‘여주독립운동사개관’) 당시 이포리 주민은 6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노약자를 제외하곤 주민 대부분이 시위에 참여한 셈이다.(조원기 여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규모도 컸거니와 조선주차군의 보고에 따르면 시위는 격렬했다. 놀란 일제 헌병대가 주재소를 습격한 군중을 향해 발포했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주민 10여 명이 체포됐지만 재판까지 가지는 않았다. 그 결과 판결 기록 등이 없어 이포 만세운동의 주동자나 구체적인 시위 양상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여주에서 일어난 첫 시위인 데다 참가 인원이 대규모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김형목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은 “면민을 대규모로 동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체계적인 계획에 따라 조직적으로 동원됐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틀 뒤 벌어진 북내면 시위 역시 조직적으로 준비됐다. 주도자는 경성공립농업학교 학생 원필희와 이원기였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 휴교령으로 귀향한 이들은 군내 각 면을 돌면서 태극기를 만들어 독립정신을 북돋우고 선전계몽활동에 나섰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3·1운동사’에서는 원필희에 대해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자 천도교 지도자였던 손병희를 따랐고 여주군의 독립운동 책임자로 북내면 시위를 이끌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원기는 “서울에서 여주와 이천 사람들에게 먹일 것으로 돼지 먹이를 저축하여 둔 모양”이라는 야유의 말을 듣고 수치스럽게 생각해 만세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여주독립운동사개관’).
이천 신둔면 시위를 기념해 신둔체육공원에 세운 기미독립선언신둔면의거기념비.
○ 7개 면이 연합한 만세시위
이천에서 만세운동이 처음 벌어진 마장면 시위의 전개 과정은 극적이다. 날이 바뀔 때마다 다른 양상을 보였다. 3월 30일 마장면 오천리에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서 만세운동을 벌인 첫날에는 평화적 시위로 끝났지만 둘째 날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천도교인들의 주도로 250여 명이 참여해 장암리에서 일어난 시위는 오천리로 향하면서 세를 불려 나갔다. 기세가 오른 시위 군중이 오천리의 일본 헌병주재소를 습격했고, 헌병들은 일본 군대의 지원을 받아 공포를 쏘면서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했다.(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시위대가 강력 반발하자 당황한 일본군이 군중을 향해 총검을 휘두르면서 시위대원 20여 명이 부상했다.
다음 날 만세운동은 더욱 격화됐다. 오천리 시위 해산 과정에서 일본군의 잔혹한 진압 사실이 알려지면서 7개 면 연합시위가 시작됐다. 마장면을 비롯해 신둔면, 백사면, 모가면, 대월면, 호법면, 읍내면에서 동시에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4월 1일 마장면 오천리에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 350여 명이 헌병분견소 앞에 모여 전날의 시위를 이어갔고, 신둔면 수광리 신둔면사무소에서도 거센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신둔면 시위는 당초 4월 2일로 예정됐다. 오천리 시위가 강제 진압당한 3월 31일 밤 이천 각 면 주민들은 신둔면 수하리에 모여 논의한 결과 7개 면이 4월 2일 연합으로 만세운동을 벌이자는 데 합의했다.
신둔면 시위가 하루 당겨진 것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려는 의도였다. 면사무소 앞에 모인 500여 명 앞에서 수하리 주민 이상혁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서기창의 선창으로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대는 행진에 돌입했다. “시위 행렬은 이천을 향하는 중 남녀노소가 동참하여 군중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 이날 밤에는 신둔면, 모가면, 백사면, 대월면에서 봉화를 울리며 시위를 계속했으며 이것이 마침내 이천군내 연합시위로 전개되었다.”(3·1동지회, ‘3·1독립운동실록’)
4월 2일 마장면 덕평리에선 300여 명이 모여 일본군과 대치했고 모가면에선 주민 150여 명이 응봉산에 올라가 만세를 불렀다. 백사면 주민들은 면사무소를 습격해 면장을 강제로 끌어냈고 만세를 부르게 했다. 대월면과 호법면 주민들도 밤에 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렸다. 수백 명이 집결한 읍내면 시위가 절정이었다. 장날인데도 상가가 완전히 철시해 군중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이용업을 하던 함규성이 시위대 앞에서 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이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일본군의 발포로 7, 8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다수가 부상했다. 시위를 구경하기 위해 대문을 나서다가 잠복 중이던 일본 군경의 총격에 부상하는 사람들도 생겼다.(신배섭, ‘이천독립운동사’).
▼ 항일 의병활동 중심지… 일제 감시 삼엄해 만세시위 늦어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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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령 공포된 다음날 의병 봉기… 이천수창의소, 日軍 100명 전멸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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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영국인 기자 프레더릭 매켄지가 경기 지역에서 촬영한 의병의 모습. 1894년부터 시작된 의병운동은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 강제 해산을 계기로 전국적인 항일의병전쟁으로 확대 전개됐다. 동아일보DB
이렇듯 여주와 이천 모두 지역의 만세시위와 함께 의병운동을 중요하게 기리고 있다. 여주 북내면에 생가가 있는 이인영(1867∼1909)이 대표적이다.
그는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뒤 군대 해산이 강행되면서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일어났을 때 전국 각지의 의병과 연합군을 조직해 13도 창의군을 결성한다. 13도 창의군이 계획했던 것은 서울에 있는 친일파를 제거하고 통감부를 쳐부수어 대한제국의 독립을 이루는 서울 진공작전이었다. 이인영은 총대장으로 임명돼 작전을 지휘했지만, 일본군과의 교전으로 후퇴하다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그가 지휘권을 군사장에게 맡기고 낙향하면서 작전은 무위로 끝나게 된다.
이천에서는 단발령 공포 다음 날인 1895년 12월 31일 의병이 봉기한 것이 경기도 내에서 선구적인 의병활동이었다. 서울에 있던 유생들이 이천으로 내려와 포군을 영입해 의병을 결성했고 안성의병 등과 함께 경기 동남부 의병들의 연합인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를 출범시킨다. 이천수창의소는 1896년 1월 신둔면 수광리에서 일본군 수비대 100여 명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적군을 거의 전멸시키면서 승리를 거뒀다. 역사의 현장인 수광리 넋고개에는 이를 기리는 항일의병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여주·이천=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